[광화문에서/이동영]설날 가족과 보는 대통령 누드화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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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영 정책사회부 차장
이동영 정책사회부 차장
 그런 그림은 예술이다. 아들딸 내외와 손자 손녀까지 함께 모여 누구 하나 당황하지 않고 진지하게 볼 수 있다면 그림이든 영화든 등장인물이 걸친 옷가지 면적이 손바닥보다 작더라도 그건 틀림없는 명작이다. 반대로 헛기침하거나 물 마시러 혹은 전화 받겠다며 일어나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이 보고 있던 그 작품은 예술성이 낮거나 외설물이라 보면 크게 틀리지 않을 듯하다.

 조각이나 그림에 누드를 많이 등장시킨 서양과 달리 이 땅의 예술 작품에서 대중이 사람의 몸 자체를 보는 일이 쉬운 건 아니었다. 산과 난을 주로 그렸던 조선시대 때 파격적으로 여성의 가슴을 그린 신윤복의 ‘단오풍정’. 여기에 그 여성을 엿보는 동자승을 그려 넣어 웃음 짓게 만들었다. 외설이라는 비판의 화살을 피하기 위한 방패이자 몸 자체로는 얼굴 붉히는 문화 소비자가 많은 탓에 ‘농도’를 낮추려는 시도다. 예나 지금이나 예술이라 해도 사람의 몸을 표현했다면 눈 크게 뜨고 맘 편히 대놓고 바라보기 쉽지 않다는 뜻이다.

 자, 그렇다면 국회 의원회관에 내걸렸던 박근혜 대통령의 패러디 누드화는 예술과 외설 혹은 저질 중 어느 범주에 들어갈 수 있을지 생각해보고 싶다.(네이버에 ‘박근혜 누드화’로 검색하면 뉴스 외 내용은 성인인증을 요구한다.) 옹호하는 쪽은 “예술적 풍자이며 표현의 자유”라는 점을 강조한다. 대통령 지지층에선 “저런 식으로 여성 비하 활동을 서슴지 않으니 블랙리스트 만드는 것도 이해가 간다”는 반응까지 나온다. 해당 누드화는 전체적으로 매춘부가 누워 관람객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올랭피아’(1863년)를 토대로, 몸은 ‘잠자는 비너스’(1510년)를 따왔다. 최순실과 주삿바늘, 세월호, 박정희, 사드 미사일, 평창 겨울올림픽 마스코트 논란을 일으킨 강아지까지 들어가 있다.

 나는 여기서 오만함과 메마른 무관용의 그림자를 느꼈다. “있는 그대로, 사실을 바탕으로 예술 작품 위에 살짝 얹은 풍자를 민의의 공간에 전시한 게 뭔 문제냐”는 찬성 측 의견은 오만함의 극치다. 아무나 의원회관에 그림을 내걸 수 없다. 문화 권력을 쥐었으면 무엇이든 어디에서나 마음대로 해도 되나 보다. 미안함은 그들의 사전 저 끝에나 있는 듯하다. 그러면서 표현의 자유만 말하는 건 현실적 오만함을 가리려는 얕은수일 뿐이다.

 새누리당이 발끈했고 여성 국회의원 몇몇이 일말의 아량 없이 비판을 퍼부었다. 이건 무관용의 전형이다. 수준 이하의 짜깁기가 세상에 나타났을 뿐인데 뿌리까지 뽑아내겠다는 기세로 달려드는 건 ‘나와 다름은 조금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독기 어린 배척정신의 발로다.

 설에도 친지와 정치 이야기는 하지 않겠다는 사람이 많다. 싸움 날까 봐 그렇다고 한다. 논란이 된 짜깁기를 놓고도 그럴 수 있다. 그걸 막으려면 ‘예술이냐 아니냐’만 놓고 토론해보고 미켈란젤로의 남자 누드 조각 다비드, 상반신을 그대로 노출한 밀로의 조각 비너스를 보며 토론 2라운드를 이어가면 일부 정치인이나 문화 권력자보다 훨씬 똑똑해질 것 같다.

 이왕 긴 설 연휴 아이들과 유익한 토론을 더 해볼 생각이라면 영문도 모르고 땅에 파묻혀 죽어간 닭과 오리 3260만 마리를 주제로 잡았으면 한다. 철저한 예방을 위해 조류인플루엔자 발생 농가 반경 3km에 살던 가금류까지 그렇게 죽였다. 한 마리를 A4용지 한 장 면적 위에서 키우다 서둘러 생을 마감시켜 사람이 얻은 이익은 얼마나 큰지 3260만 마리의 생명과 견주어보자. 그에 앞서 가축이었지만 사람을 위해 태어났다가 사람을 위해 생매장당한 그 생명들에게 다음 생에선 부디 좋은 땅에서 태어나라고 기도해 주자. 설이니까.
 
이동영 정책사회부 차장 argus@donga.com
#박근혜#새누리당#패러디 누드화.설 연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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