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 두고 화투 치던 공간이 책 읽는 공간으로 거듭나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2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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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도서관에 날개를]동아일보-작은도서관만드는 사람들 공동 캠페인
원주시 신림면 황둔송계경로당

《시골 작은 집에 책 읽기를 좋아하는 할머니가 산다. 하지만 시골집에는 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 과일을 따고, 가축을 돌보고, 장마에 대비하고…. 손님도 찾아오기 때문에 겨울이 깊어서야 마음껏 책을 읽을 수 있었다. 그림책 ‘책 읽기 좋아하는 할머니’의 줄거리다.》
 

황둔송계경로당 입구에 걸린 ‘책 읽는 방’ 현판. 작은도서관만드는사람들 제공
황둔송계경로당 입구에 걸린 ‘책 읽는 방’ 현판. 작은도서관만드는사람들 제공
 “옛날 우리 어린 시절처럼 닭도 나오고, 도마뱀도 나오고, 쥐도 나오고 그러네요. 책? 옛날에는 좋아했지요. 이제는 눈이 어두워서 잘 못 보는데 이거는 그래도 글자도 안 작고, 그림도 많네.”

 전순득 씨(75)가 12일 강원 원주시 신림면 황둔리 황둔송계경로당에서 ‘책 읽기 좋아하는 할머니’를 읽고 말했다. 치악산 자락의 황둔리는 찐빵이 유명하고 인근에 휴양림과 계곡이 있는 시골 마을이다. 이곳에서 태어난 전 할머니는 책 속 할머니처럼 고추, 콩, 팥, 옥수수 농사를 짓느라 평생을 바쁘게 살았다. 요즘처럼 농사일이 좀 한가한 겨울철에 경로당에 오면 심심해서 ‘윷을 들었다 놨다’ 할 뿐이었다.

 이날 경로당에는 사단법인 ‘작은도서관만드는사람들’이 기증한 책 200여 권과 책장이 새로 들어오며 ‘할매·할배 책 읽는 방’이 생겼다. 이 단체는 그동안 시골 학교에 마을 도서관을 꾸미는 등 전국에 작은 도서관 350여 곳을 만들었지만 경로당을 책 읽는 공간으로 바꾼 건 이번이 처음이다.

 “마을 어르신들이 경로당에 와서 화투나 술 말고 문화적으로 즐길 거리가 있었으면 해서 독서 공간을 만들어 드리고 싶었어요. 그런데 비용도 부담인 데다 서울 동대문에서 헌책을 사려고 했더니 어르신들이 좋아하실 만한 책을 고르기도 힘들고…. 그러다가 신문에서 ‘작은도서관…’ 기사를 보고 도움을 요청했는데 마음이 통했나 봐요.”

강원 원주시 신림면 황둔리 마을 어르신들이 12일 황둔송계경로당에서 ‘작은도서관만드는사람들’이 기증한 책을 들고 있다. 작은도서관만드는사람들 제공
강원 원주시 신림면 황둔리 마을 어르신들이 12일 황둔송계경로당에서 ‘작은도서관만드는사람들’이 기증한 책을 들고 있다. 작은도서관만드는사람들 제공
 황둔1리 이장인 윤진철 씨(69)가 도서관을 개관하게 된 사연을 기쁘게 말했다. 다른 마을 어르신들의 반응도 뜨거웠다. ‘작은도서관…’은 어르신들의 눈높이에 맞춰 큰 글자체로 출판된 한국문학전집, 그림책, 오디오 북, 건강 관련 책, 평범한 노인이 쓴 시집·수필집, 어르신의 사랑 이야기를 담은 만화 등을 서가에 채웠다.

 “동화 ‘팥죽 할머니와 호랑이’를 읽었는데 옛날에 듣던 이야기하고 달라. 팥죽을 이고 가다가 어쨌다고 들었는데, 여기에는 밤도 나오고, 거북이도 나오고. 함께 사는 아홉 살, 열 살 손주들 읽어주면 좋겠네.”(김정순 씨·70)

 주민 백낙진 씨(77)는 “젊은 시절엔 책을 많이 읽는 편이었는데, 요즘엔 집에 책이 별로 없어 잘 못 봤다”며 “경로당에서도 장기를 두거나 화투를 쳤는데 이제 책을 많이 읽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전순자 씨(72)도 “소일거리가 없어 시간이 나면 스마트폰으로 게임이나 했는데, 책이 있으면 책을 봐야지”라고 말했다.

 이날 경로당에서 가까운 황둔1리 마을회 체험관에서는 마을 주민 60여 명이 모인 가운데 가수 서수남 씨(73)가 공연을 했고, 노인을 소재로 동화를 쓰는 김인자 작가가 책을 읽어줬다. 김 작가는 요양병원 등에서 어르신들에게 책을 읽어드리는 일을 수십 년째 해오고 있다. 그는 “어르신들이 독서에 대한 욕구가 분명히 있지만 일상에서 책을 읽을 환경이 잘 만들어지지 않고 있다”며 “젊은이들이 떠나고 시골에 남은 노인들이 창조적이고 정신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정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원주=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도서관#황둔송계경로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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