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박현진]조선업의 ‘그레셤 법칙’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5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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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진 산업부장
박현진 산업부장
세계 조선업계를 이끌어왔던 한국의 조선사들이 지난달 선박을 한 척도 수주하지 못했다.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였던 2009년 9월 이후 약 7년 만이자 역대 세 번째다. 글로벌 경기부진의 여파로 세계 선박 발주 규모 자체가 준 것이 직접적인 원인일 수 있지만 경쟁국의 수주 실적을 보면 이것만을 핑곗거리로 삼기는 부족하다. 한국은 올 들어 4월까지 선박 누적 수주량에서 프랑스에도 밀려 중국 이탈리아에 이어 4위를 기록했다. 1980년대 이후 한 번도 연간 수주량에서 3위 아래로 떨어져 본 적이 없는 한국 조선업이다.

문제는 구조조정의 여파가 이런 ‘수주 절벽’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금주 중 채권은행에 2조여 원 규모의 비용을 절감하는 자구계획안을 제출하기로 한 현대중공업은 요즘 곤혹스럽다. 해외 선주들이 협상 과정에서 현대중공업을 회생 불가능한 기업처럼 언급하며 발주 자체를 꺼리고 있다는 것이다. 세계적인 석유기업인 사우디아라비아 아람코의 협상팀들도 수시로 “너희들은 괜찮냐”고 물어온다고 한다. 삼성중공업도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다. 지난해 말 기준으로 부채비율이 7308%로 네 차례에 걸쳐 6조5000억 원 규모의 국민 혈세(공적자금+국책은행의 자금)가 투입된 대우조선해양과 두 조선사를 동일선상에서 보기 시작한 것이다. 현대중공업과 삼성중공업의 부채비율은 각각 134%와 298%로 상대적으로 나은 편이며 올 1분기에 나란히 흑자를 기록했다. 최근의 자구안은 세계 조선업계의 불황이 장기화할 것에 대비한 선제적인 구조조정 성격에 가깝다. 그런데 해외에서는 좀비기업의 부실처리 과정으로 비치고 있다는 점이 우려스럽다.

이런 현상을 보면서 16세기 영국의 재무관 토머스 그레셤이 주장해 후일 ‘그레셤의 법칙’으로 명명된 경제법칙이 연상된다.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驅逐)한다’로 불리는 이 법칙은 나쁜 돈이 좋은 돈을 시장에서 몰아낸다는 뜻이다. 부실기업의 처리가 지연되면서 그나마 생존 가능한 기업까지 시장에서 극한으로 몰리는 상황에 비견할 만하다.

원래 이 용어는 순도가 떨어지는 금화와 은화를 시중에 풀면 순도가 높은 금·은화는 집에 보관하려 하고 저질의 통화만이 유통되는 현상을 짚은 것이다. 그러나 현대사회로 접어들면서 이 법칙은 다른 의미로 해석되고 활용되고 있다. 바로 단기적인 이익과 도덕적 해이에 기인한 나쁜 정책과 경영 판단이 장기적이고 전략적인 옳은 결정을 막는다는 것이다.

2000년 산업은행이 대우조선해양을 자회사로 삼은 뒤 일어났던 16년의 과정이 딱 그랬다. 거의 2년이 임기였던 대우조선해양 사장들은 단기실적에 집착해 저가 수주를 일삼았다. 다른 조선사들은 불만을 털어놓으면서도 동참해 조선업의 동반 부실을 불러 왔다. 대우조선은 2013년과 2014년 각각 4409억 원과 4711억 원의 영업이익을 냈다고 밝혔다. 하지만 올 들어 뒤늦게 2013∼2015년 3년간 2조6000억 원의 누적적자를 냈다고 수정 공시한 대목에서는 말문이 막힌다. 이 과정에서 회계감사는 아무 의미가 없었고 경영진은 거액의 연봉을 챙겨갔다. 산업은행 등 채권은행은 대우조선에 자기 사람을 박기에 바빴고 금융감독기관은 이런 상황을 과연 몰랐을지 현재로선 의심만 갈 뿐이다. 세간에서 얘기하듯 정말 한통속으로 어우러진 ‘그들만의 리그’였는지 검찰과 감사원이 반드시 진실을 밝혀주기 바란다.

문제는 앞으로다. 구조조정의 최종 목표는 부실기업을 솎아내 해당 업종의 지속가능한 경쟁력을 키우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기업별로 차별화된 접근법이 필요하다. 고도의 기술을 요구하는 수술이겠지만 또다시 악화가 양화를 몰아내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박현진 산업부장 witness@donga.com
#조선업#구조조정#수주 절벽#그레셤 법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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