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정용관]망국법의 변명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2월 2일 03시 00분


코멘트
정용관 정치부장
정용관 정치부장
동네북. 요즘 내 신세다. 나는 사실 축복 없이 태어난 사생아였다. 2012년 5월 2일, 임기가 거의 끝난 18대 국회의원 127명의 동의 덕분에 세상의 빛을 볼 수 있었지만 주위의 냉랭한 시선부터 온몸에 느꼈던 것 같다.

돌이켜 보면 나를 잉태한 씨앗은 해머, 전기드라이버, 소방호스 등이었다. 2008년 12월 당시 한미 FTA 비준동의안 상정을 저지한다며 국회 외통위 회의장 출입문을 해머로 부수던 민주당 문학진 의원의 당당함 기억나는가? “도둑을 잡을 때 필요하면 저는 몽둥이를 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 최루탄도 빼놓을 수 없다. 국회의장석 앞에서의 최루가루 살포는 폭력국회의 화룡점정이었다.

나는 그 와중에 태어났다. 이른바 몸싸움 방지법, 국회선진화법이란 화려한 이름으로…. 당시 초선이던 홍정욱 의원이 초안을 만들었고, 쇄신파와 가까웠던 황우여 원내대표 등이 앞장섰지만 4·11총선 직후 선거에서 승리한 박근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의 한마디가 결정적이었다. “지금 선거가 끝났다고 우리가 선거 전의 그 마음을 잊는다면 국민의 심판을 받을 것이다.”

최근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의 ‘권력자’ 발언이나 정의화 국회의장의 “나야말로 식물국회를 우려했던 당사자였다”는 항변은 논외로 치자. 내 생각엔 총선 때 국회선진화법 통과를 공약까지 했는데 과반수를 차지했다고 입을 딱 씻는 것은 ‘박근혜 스타일’이 아니었던 듯하다.

이후 상황은 알려진 그대로다. 19대 국회에서 야당은 슈퍼 갑 행세를 했고 사사건건 국정의 발목을 잡았다. 청와대의 높은 담장을 넘어 들려오는 박 대통령의 깊은 한숨 소리에 작금의 입법 마비 사태는 모두 나, 국회선진화법 때문에 벌어진 일인 것 같아 몸 둘 바를 모를 정도다.

괜히 말 못 하는 동물과 식물한테도 미안한 마음까지 든다. 국회에서 법이 잘 통과되지 않을 때마다 “18대 국회가 동물국회였다면 19대 국회는 (식물인간 상태에 빗대) 식물국회”라고 하는데, 오히려 나름대로의 위계와 룰을 갖고 돌아가는 동물의 왕국과 식물의 세계에선 ‘인간국회’라는 비아냥거림이 통용될지도 모르겠다.

넋두리가 길었지만 살려 달라고 애원하려는 건 아니다. 다만 나를 만든 모든 이들에게 되묻고 싶은 건 있다. 나는 선천적으로 괴물이었던 건지, 태어난 지 채 4년도 안 돼 후천적으로 괴물이 된 건지….

외과의사 출신 국회 수장이 더 늦기 전에 수술 부위를 정해 준다고 해서 내심 기대를 해 본다. 하지만 걱정부터 앞서는 걸 어쩌랴. 수술대에 올릴지 말지, 수술대에 올릴 경우 어디부터 뭘 어떻게 수술할지를 놓고 여야가 티격태격할 게 불을 보듯 뻔하다. 무엇보다 4·13총선을 앞두고 여야의 속셈도 다를 테니 ‘게임의 룰’ 변경에 대한 해법도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결국 남는 건 국회의장의 결자해지밖에 없을 것 같은데, 직권상정 요건을 강화하기 위해 만든 법을 직권상정으로 해결하겠다는 것도 영 찜찜하다.

새누리당은 꼭 1년 전 선진화법의 ‘5분의 3’ 규정이 위헌이라며 헌법재판소에 권한쟁의 심판을 청구했다. 헌재는 심리를 미루다 최근 첫 공개 변론을 열었지만 “국회 일을 왜 헌재에 가져왔느냐”는 식의 반응을 보였다. 사생아이긴 하지만 나도 법으로서 국회가 아닌 법의 심판 절차를 밟고 싶다. 나를 둘러싼 논쟁을 말끔히 끝낼 곳은 딱 한 곳, 헌재라고 믿기 때문이다,

헌재는 국회가 자율적으로 해결할 일 아니냐고 힐난 하지 말고 결정을 서둘러 주길 바란다. 또 여야는 헌재 결정이 나오면 더 이상 나처럼 불행한 법이 탄생하지 않도록 머리를 맞대 주길 호소한다. 이번 총선에서 누가 다수당이 되고 소수당이 되든지!

정용관 정치부장 yongari@donga.com
#새누리당#선진화법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