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광표]컬렉터 한창기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월 27일 03시 00분


코멘트
이광표 오피니언팀장
이광표 오피니언팀장
요즘 전통문화 분야에서 민화(民畵)의 인기가 높다. 학술적 연구는 물론이고 다양한 민화 전시가 이어지고 민화를 배우려는 사람도 부쩍 늘었다. 민화박물관도 속속 들어서고 있다. 민화에 감춰진 현대적 미감의 재발견이다.

이 시대에 민화가 사랑을 받는 데에는 여러 사람의 공이 있겠지만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있다. 바로 한창기다. 전통 민화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척박하던 1970년대 초, 한창기는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전시회를 열고 ‘한국 민화의 멋’이란 책도 출간했다. 오늘날 판소리에 대한 관심 역시 한창기에게 큰 빚을 졌다. 당시 그는 ‘브리태니커 판소리회’를 결성해 매주 판소리 감상회를 열었고 음반으로 복원해냈다. 판소리 부흥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한창기는 1997년 세상을 떠났다. 당시 언론은 부고를 통해 그의 삶을 이렇게 요약했다.

‘전남 보성군 벌교 출생. 서울대 법대 졸업. 법조계가 자신의 길이 아님을 깨닫고 미8군에서 비행기표와 영어성경책 등을 판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세일즈맨으로 활약. 한국브리태니커 대표 역임. 1976년 월간 ‘뿌리깊은나무’를 창간해 처음으로 한글 전용과 가로쓰기를 도입. 1980년 신군부에 의해 ‘뿌리깊은나무’가 강제 폐간된 뒤 1984년 ‘샘이깊은물’ 창간. ‘한국의 발견’ ‘판소리 전집’ ‘민중 자서전’ 간행 등 전통문화 부흥에 헌신….’

전통과 낭만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지금도 그의 이름을 기억할 것이다. 어떤 이는 한 시대를 풍미한 월간지 ‘뿌리깊은나무’ ‘샘이깊은물’의 발행인으로 그래서 한국 출판의 역사에 획기적인 족적을 남긴 출판인으로 기억할 것이고, 어떤 이는 멋쟁이 세일즈맨의 상징으로 기억할 것이다. 또 다른 누군가는 전통문화 보존 복원에 헌신했던 사람으로 기억할 것이다.

한창기가 남긴 흔적은 깊고 그윽하다. 그는 ‘오래된 것의 아름다움’에 푹 빠져 살았던 당대의 예인(藝人)이었다. 오래된 것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섬세하고 따스했으며 소박하고 그윽했다. 그는 특유의 심미안과 따스한 마음을 바탕으로 우리 문화재를 수집했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팔아 번 돈으로 젊은 시절부터 부지런히 유물을 모았다. 평소 “꿈꿔온 일을 위해서라면 돈을 낙엽처럼 태울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해온 그였다.

주변 사람들은 한창기를 이렇게 회고한다. “젊디젊은 30대부터 죽음이 지척에 다가와 있었던 마지막 남은 몇 날까지 골동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았다… 그의 마지막 컬렉션은 병상에 누워 인사동의 한 골동품상에서 열린 고미술전 카탈로그를 보고 오매불망하다가 끝내 남의 손을 빌려서 사들이고야 만 아름답고 기품 있는 장롱과 백자라고 한다. 그가 세상을 뜬 병실 침대 밑에서는 그가 만지작거렸던 그 백자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한창기는 6400여 점의 문화재를 수집했다. 장승 벼루 한복 석불 석탑 석등 문인석 무인석 토기 분청사기 목가구 민화 등 서민들의 삶이 배어 있는 문화재들이다. 특히 민화를 많이 모았다. 그가 세상을 떠나고 우여곡절 끝에, 2011년 유족들과 순천시는 그의 컬렉션을 소장 전시하고 연구하기 위해 고향 인근 낙안읍성 옆에 ‘뿌리깊은나무박물관’을 건립했다.

2월 3일은 한창기의 기일(忌日)이다. 이제 그를 전통문화 컬렉터로도 기억해야 할 때다. 뿌리깊은나무박물관 전시실에서 만났던 백자 한 점이 떠오른다. 병실 침대 밑에서 발견되었다던, 세상을 뜰 때까지 그렇게도 만지작거렸다던 바로 그 백자….

이광표 오피니언팀장 kplee@donga.com
#전통문화#민화#한창기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