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김민경]자수성가 회장님의 귀환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6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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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경 여성동아 편집장
김민경 여성동아 편집장
자수성가라는 말은 내 인생과 가장 멀리 있는 단어 중 하나다. 전혀 자수성가하지 못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지 않아서다. 대부분 사람들이 비슷할 거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요즘은 자수성가한 사람을 찾아보기도 쉽지 않다. 새로운 인터넷 서비스로 투자를 받고 매각과 합병 등을 통해 부를 쌓은 스마트한 기업가들은 종종 있다. 하지만 물려받은 것 없이 성공했대도 이들에게 ‘자수성가’란 어울리지 않는 명명 같다. 인심 써서 ‘천재 벤처사업가’로 불러준다.

자수성가란 말에는 어쩐지 아련한 울림이 있다. 동시대를 살아온 사람이라면 한번쯤 가졌던 결핍과 열정, 실패와 의지, 포기와 간절함 같은 감정들이 그 인생에 지층처럼 쌓여 있을 때 비로소 자수성가란 말에 공감한다. 자수성가한 이들의 우여곡절은 다음 회가 궁금한 연속극처럼 흥미진진한 데다 역사적 사실이 끼어드는 팩션의 재미까지 더해져 나 같은 미생이 물개박수를 치곤 한다.

여기까진 시청자 입장. 현실에선 어떨까. 혼자 모든 장애물과 싸우며 성공한 회장님은 자기 경험에 대한 확신이 엄청나게 강하다. 또한 자신이 만든 상품에 자식 이상의 애정을 갖고 있어서 이보다 더 좋은 제품은 없다고 믿는다. 그래서 직접 광고모델도 한다. 자수성가 회장님의 이런 신념에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기에 회사는 권위주의적인 조직으로 굳어지고 정체기를 맞는다. 이를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따라 회사의 운명이 달라지는 걸 목격하곤 한다. 창사 이래 똑같은 제품만 생산하는 자수성가 회사 간부에게 “여성 소비자들은 작은 변화에 민감하니 새로운 포장 디자인이라도 나오면 좋겠다”고 말하니 “회장님이 이 디자인에 애착이 있다. 이미 만들어 놓으신 포장재로 다 팔라는 지시가 있어 곤란하다”는 답을 들은 적도 있다. 한마디로 자수성가는 고집불통의 아이콘이 되기에도 딱 좋다.

최근 크림 하나로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꽤 유명해진 화장품 회사가 신제품을 내놓았다. 자수성가 회장님이 무대에 등장한 데까진 예상대로였다. 그런데 그가 기존 크림의 명성과 기득권을 포기하고 완전히 새로운 제품을 들고 나왔다. 더 놀라운 건 “40년 동안 여성 부장 한 명 없던 회사에 처음 여성 임원을 뒀다. 이걸 자랑하고 싶다”는 그의 말이었다. 기업에서 중요한 정책을 결정하는 자리에 여성이 있는 예는 여전히 드물다. 세계적으로도 이런 면에서는 기업이 정관계보다 보수적이다. 화장품을 만드는 이 회사에도 그간 한 명의 여성 간부도 없었다. 그는 일흔이 넘어 자기 경험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여성 임원을 기용하는 용기를 낸 것이다. 한동안 다른 업종으로 사업을 확대하던 그가 다시 화장품으로 돌아와 제2의 자수성가에 도전한 데는 중국의 영향도 컸을 것이다. 가짜 때문에 골치를 앓는 중국에선 제품 개발자나 의사 등 전문가가 얼굴과 이름을 내걸고 품질을 보증하는 상품들이 잘 팔린다. 우리에겐 진부한 자수성가 스토리가 중국에선 ‘핫’한 마케팅이 되는 것이다. 중국과 국내의 새로운 소비자들을 겨냥한 신제품 포장에 회장의 만화 캐리커처가 실려 있다. 아마도 그가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던 시절의 얼굴을 코믹하게 만든 캐릭터인 듯, 근엄한 회장님 얼굴은 전혀 아니다. 복고적이어서 절묘하게 포스트모던한 이 디자인이 회장과 여성 임원의 첫 합작품이라고 한다.

품질에 대한 고집 하나로 자수성가한 우리 기업가들의 꿈이 중국이라는 독특한 시장에서 현재진행형으로 펼쳐지기 시작했다. 아무리 읽고 들어도 역시 나와는 거리가 먼 이야기지만, 감히 그들에게 건투를 빌어드리는 바다.

김민경 여성동아 편집장 holde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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