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일 쌍용차사장 “난 행복한 소방수 CEO”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3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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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년간 최고경영자…
24일 퇴임 이유일 쌍용차사장이 말하는 ‘내인생의 4대 전환점’

올해 1월 21일, 쌍용자동차의 소형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티볼리’의 언론 시승 행사가 열렸던 서울 여의도의 서울마리나 클럽&요트에서의 점심식사 현장. 이유일 쌍용차 사장이 “3월에 주주총회가 열려 임기가 끝나면 그만둘 생각”이라는 ‘폭탄 선언’을 했다.

그때까지 모기업인 인도 마힌드라&마힌드라 그룹의 전폭적인 신뢰를 얻고 있던 이 사장이 연임할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었다. 놀란 기자들이 확인차 되물어도 답은 똑같았다. “누가 뭐라고 해도, 죽어도 절대 안 한다.”

‘사운을 걸었다’던 티볼리가 성공적으로 시장에 론칭해 “쌍용차가 부활의 날갯짓을 하기 시작했다”는 평가가 나오던 시점에 퇴임의 뜻을 밝힌 것이다. 그는 오래전에 결심을 굳혔다는 말투였다. “그동안 해남 땅끝마을이나 국내 섬에 너무 못 가봤다. 이제 시간이 나면 그런 곳을 여행하고 싶다.”

1969년 현대자동차에 입사한 지 46년, 1989년 현대차 캐나다 법인장으로 최고경영자(CEO)가 된 지 26년 만이다. 그의 CEO 인생 대부분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24일 주주총회에서 정식으로 물러나는 이유일 사장의 파란만장한 자동차 인생을 되돌아봤다.

① 캐나다에서의 첫 패배

그는 1980년대 중반, 현대차 수출본부장을 맡고 있었다. 당시 현대차는 북미시장 진출을 위해 캐나다 공장 설립을 추진했다. 도전정신은 좋았지만 이유일 수출본부장의 눈에는 승산 없는 싸움이었다. 당시 캐나다는 전체 승용차 시장 규모가 60만 대 수준이었다. 회사는 쏘나타를 10만 대는 팔 수 있을 거라고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힘든 목표였다. 회의에서 솔직하게 의견을 밝히자, “젊은 사람이 왜 이렇게 패기가 없나”, “뭘 알지도 못하면서 왜 반대만 하느냐”는 식의 비판만 돌아왔다. 회사는 포니의 성공에 취해 있었다. 현대차가 추진한 첫 해외공장이 실패할 것이라는 의견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국 캐나다 진출은 추진됐다.

한국 자동차 역사상 최초의 해외 현지 공장이 들어설 캐나다 퀘벡 주 브로몽 시. 가슴 벅차야 할 장소지만 이곳을 처음 둘러본 이유일 사장의 머릿속은 갑갑함으로 가득 찼다. 너무 외진 곳이었다. 산업만 생각하면 당연히 차 산업의 메카인 미국 디트로이트 같은 곳을 갔어야 했다. 하지만 당시 캐나다 정국은 프랑스어권인 퀘벡이 독립하겠다며 연방정부와 갈등을 빚던 때. 연방정부는 퀘벡을 달래기 위해 이 지역에 공장 설립이 필요했고, 확실한 지원을 약속했다. 여기에 현대차가 호응한 것이다. 당시 5300만 캐나다달러를 지원받았고, 공장은 1989년 7월 완공됐다. 회사는 이 사장에게 캐나다 현지법인장을 맡겼다.

쏘나타 생산은 시작됐지만, 손익분기점인 6만 대는커녕 생산량은 2만여 대에서 늘어날 줄을 몰랐다. 주변에 부품공장이 없다 보니 웬만한 부품을 한국에서 가져다 썼는데, 물류비가 차 한 대당 600달러 정도 들었다. 완성차를 한국에서 만들어 가져와도 물류비가 400달러면 충분할 때였다. 적자가 1년에 1억 달러씩 쌓여 갔다.

결국 1993년 공장은 가동을 멈췄고 철수가 결정됐다. 공장은 1994년 완전 철수했다. ‘정말 비싼 수업료구나….’ 이 사장은 생각했다.

② 법정관리인으로 만난 쌍용차

2009년 초, 호텔아이파크 대표이사로 지내던 이 사장에게 전화 한 통이 걸려 왔다. “서울중앙지법 파산부에 있는 이동원 부장판사입니다. 쌍용차가 법정관리에 들어가는데, 혹시 관심 있으신지요?” 그 다음 날 면접을 봤다. 이렇게 법정관리인으로 쌍용차와 인연이 시작됐다.

2009년 2월 3일, 첫 출근일이었다. 대주주였던 상하이자동차 사람들도 다 떠나고 사무실은 텅텅 비어 있었다. 비서실에도 사람이 없었다.  
▼ “티볼리로 해피엔딩… 늘 힘들었지만 할만큼 했다” ▼

이유일 쌍용차사장 스토리


공동관리를 맡게 된 박영택 공동 법정관리인으로부터 지금까지의 상황을 전해 들었다. 3일 뒤 평택공장을 처음 가봤다. 한상균 당시 금속노조 쌍용차지부장 등 노조원들이 입구에서 진입을 막고 “우리의 요구사항”이라며 봉투를 건넸다. “한 명의 직원도 절대 해고할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쌍용차는 이 사장의 지휘하에 구조조정에 들어갔다. 노조원들이 이에 반발해 평택공장을 76일간 점거하며 농성을 벌였다. 바로 ‘쌍용차 사태’다. 당시 공장에서는 내내 새총으로 쏜 돌이 날아다니고 화염이 치솟았다.

이 사장은 두 달 넘게 이어진 파업 기간 중 평택공장 사무실에 야전침대를 가져다 놓고 숙식을 해결하며 노조를 설득했지만, 노조원이 던진 철제 의자에 맞기도 하는 등 상황은 여의치 않았다. 8월에야 노사는 합의를 이뤘고 공장은 조금씩 정상화되기 시작했다.

③ “가장 힘들었던”… 쌍용차 청문회

그때를 잊을 수가 없다. 2012년 9월 20일. 20여 년의 CEO 생활 중 가장 힘든 순간이었다. 11시간 45분의 인내심을 시험받았던 순간이다. 바로 국회에서 열린 쌍용차 구조조정 관련 청문회가 열린 날이다.

오전 9시 반쯤 국회에 도착해 10시에 증인 선서를 했다. 이후 오후 9시 45분 국회를 나설 때까지 내내 환경노동위원회 소속 국회의원들의 질타가 이어졌다. 은수미 민주통합당 의원은 “2646명의 노동자를 마음대로 자른 당신은 살인자”라며 몰아붙였다. 질의 및 응답 시간이 5분이라면 4분 30초가 질문이었다. 표현만 바꾼 똑같은 질문이 계속됐고 해명은 제대로 할 수 없는 시간이 이어졌다.

점심시간, 회사에서 가져온 버스 안에서 도시락으로 끼니를 때우면서 오기가 생겼다.

쌍용차를 정상화시키기 위해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정부와 정치권, 은행 관계자들을 만나고 다녔지만 누구도 쌍용차가 살아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노골적으로 “시장점유율이 2%도 안 되고 망해도 국내 경제에 미치는 영향도 미비할 텐데, 망하는 게 맞는 거 아니냐”는 사람도 있었다. 오기가 발동했다. “쌍용차가 그것밖에 안 돼? 내가 아니라는 걸 직접 보여주겠다”는 생각이 차올랐다. 이런 마음을 먹으니 청문회에서도 더 당당해질 수 있었다.

④ ‘티볼리’의 탄생


법정관리인으로 왔을 당시 회사 내부적으로 신상품 계획이 있었다. 프로젝트명은 ‘D200’. 렉스턴보다도 큰 차였다. 시장조사를 해보니 큰 차가 아니라 작은 차가 맞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소형 SUV’로 신차 개발의 방향이 정해졌다.

매각과 관련해 세계 유수의 업체들로부터 내내 퇴짜를 맞고 있던 때 법원 파산부로부터 인도 마힌드라&마힌드라 그룹에서 연락이 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오너를 만나게 해달라”고 요청해 마힌드라 회장을 만났다.

아난드 마힌드라 회장은 절대 숫자나 시시콜콜한 걸 묻지 않는 점이 다른 경영자들과 달랐다. 그가 묻는 것은 ‘비전’뿐이었다. 마힌드라 회장은 “나는 전혀 돈 벌 생각이 없다. 난 좋은 회사를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이 사람이구나’ 싶었다. 이렇게 쌍용차는 마힌드라에 팔렸다.

티볼리의 프로젝트명은 X100. 매달 X100 제작 점검회의가 열렸다. BMW ‘미니’나 기아자동차의 ‘쏘울’, 쉐보레 ‘트랙스’ 등 경쟁 차종 모델들을 샅샅이 뜯어보며 참고했다. 서울에서 설악산 일대까지 이어진 시험주행에서 이 사장은 노령에도 교대 없이 혼자서 6시간 반 동안 내내 시험 모델을 운전하며 고쳐야 할 부분을 지적했다. 산고 끝에 티볼리가 탄생했고 이 사장은 퇴임의 뜻을 마힌드라 측에 밝혔다.

“나는 회사가 어려울 때만 CEO를 맡았어요. 그래서 스스로를 불을 끄는 ‘소방수’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문을 연 캐나다 공장을 스스로 닫았고 쌍용차야 말할 것도 없고요. 후회는 없습니다. 입사 후 46년 됐습니다. 이 정도 했으면 월급쟁이로서 행복한 거죠. 회사가 흑자를 내지 못했을 때 물러나는 건 아쉽지만, 도망가지 않았다고 자부합니다.” 이 사장의 퇴임 소감이다.

김성규기자 sunggyu@donga.com
#이유일#CEO#쌍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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