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사 반성’ 금기 깬 獨 양심…바이츠제커 前대통령 별세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2월 1일 19시 4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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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전후(戰後) 40년 만에 독일을 자유롭게 했다.” (독일 시사주간 슈피겔)

나치 독일의 과거사 반성을 촉구해 독일의 ‘도덕적 양심’ 회복에 큰 영향을 끼쳤던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전 독일 대통령이 31일 타계했다. 향년 94세.

바이츠제커는 1984년~1994년 서독 및 통일 독일의 대통령을 지냈다. 그는 1985년 서독 의회에서 “과거에 대해 눈을 감은 자는 현재도 보지 못한다”며 나치 독일 과거사 반성을 촉구한 ‘2차대전 종전 40주년 기념 연설’로 세계적인 찬사를 받았다.

바이츠체커는 당시 연설에서 “5월 8일(종전기념일)은 우리 독일 민족이 히틀러 정권에서 해방된 날”이라며 “우리는 죄가 있건 없건, 젊었든지 늙었든지 과거를 받아들여야 하고 책임을 통감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종전기념일이 ‘해방일’이라는 표현은 독일의 자기인식에 중요한 의미를 가진 불가피하고도 명확한 언급이었다”며 “바이츠제커의 죽음은 독일의 커다란 손실”이라고 애도를 표했다.

고인은 1920년 슈투트가르트의 명문가에서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조부는 독일제국 시대 주 총리를 지냈고 아버지는 나치 시절 외무부 차관까지 역임한 직업 외교관이었다. 바이체커는 부친이 뉘르베르크 전범재판정에 섰던 아이러니한 과거도 갖고 있다.

1990년에는 당시 헬무트 콜 서독 총리와 함께 독일 통일과정에서 정신적 지주의 역할을 했다. 그는 대통령 재임기간 중 외국인 이민자 통합, 가난한 동독인들을 위한 부유한 서독인들의 경제적 희생을 촉구했다. 고인은 또한 1985년 서독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이스라엘을 방문했고, 1990년에는 통일독일에 대한 주변국의 우려를 불식하기 위해 폴란드를 방문해 2차대전 종전 후 획정된 국경을 침범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고인은 독일의 대표적인 친한파 정치인으로 한국을 여러 차례 방문하기도 했으며 고(故) 김대중 대통령과는 40년 지기로 각별한 인연이 있었다. DJ가 박정희 대통령 때인 1973년 일본에서 납치되었을 때부터 1980년 내란음모혐의로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 등 정치적 고비마다 지지의사를 표명하고 독일 의회를 움직여 ‘김대중 구명 결의안’을 채택하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 이후에도 자주 한국을 찾아 한반도 통일 문제에 대해 조언을 해왔다.

1999년 내한 강연에서는 “냉전시대 열강들은 동서독의 분단을 ‘해결해야 할 과제’가 아니라 ‘받아들여야 할 현실’로 여겼다”며 “독일의 교훈처럼 한반도 통일은 하루아침에 이뤄지지는 않으나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빨리 찾아올 수 있다”고 말했다.

파리=전승훈 특파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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