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BR]신분제 폐단 무너뜨린 英祖의 ‘여염집 탈취 금지령’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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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잘 살고 있던 집에서 갑자기 쫓겨나게 된다면 어떤 기분일까? 조선시대엔 이런 문제가 자주 발생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힘없는 일반 백성들이 집을 빼앗기고도 말 못 하고 쫓겨나는 일이 많았다. 권세가들은 별별 기상천외한 방법을 동원해 민가를 차지했다. 예를 들어 전염병이 돌면 궁 안 사람들이 병을 피한다는 명목으로 민가에서 생활하는 것을 허용했는데, 이때 아주 좋은 집으로 피난을 가서 원래 살고 있던 사람을 내보낸 뒤 그 집에서 안 나오고 버티는 식이었다.

백성들은 억울하게 집을 빼앗겨 놓고도 권세가의 보복이 무서워 고발도 못 하고 쉬쉬하는 사례가 많았다. 영조는 왕이 되기 전 궁 밖에 살면서 이런 광경을 여러 번 목격했다. 그래서 왕이 되자마자 강력한 법안 하나를 만들었다. 바로 ‘여염집 탈취 금지령’이다. 권세가들이 일반 백성들의 여염집을 빼앗는 불법을 반드시 뿌리 뽑겠다는 의지를 강력하게 드러낸 법령이었다.

어린 시절 궁 밖에서 자란 영조(1694∼1776)는 왕이 법령을 내려도 시행 과정에서 어떻게 왜곡되고 형식화되는지 너무 잘 알았다. 여염집 탈취 금지령을 내리면 분명히 매매나 전세로 위장할 거라는 사실도 미리 눈치 챘다. 그래서 영조는 아예 매매와 전세조차 금지시켜 버렸다. 그 결과 도성 내 집 매매 자체가 불법이 됐다. 민가에 세를 내어 사는 것 역시 불법이 됐다. 한마디로 그냥 지금 사는 집에 평생 살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이처럼 엄격한 법 집행으로 여염집 탈취는 확실히 줄어들었다. 그러나 권세가보다 가난한 양반들이 죄를 뒤집어쓰는 경우가 많았다. 또 이사가 불가능하고 금지령을 지나치게 엄하게 적용해 형조나 한성부 관리들이 마구잡이로 위반자를 잡아들이는 등의 폐단도 늘어났다.

영조가 이렇게 무리수를 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영조가 진짜 바꿔놓은 관행은 여염집 탈취 금지를 넘어, 고위층의 불법에 대해 힘없는 백성도 고발할 수 있는 문화를 확산시킨 것이었다. 조선시대라고 일반 백성이 양반의 불법을 아예 고발조차 할 수 없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조선은 철저한 신분제 사회였기 때문에 법적으로 고발을 허용해도 실제로는 고발이 불가능했다. 천하의 세종도 현실에 구현하지 못한 조선의 법 관행이 바로 아랫사람의 고발 제도였다. 사람들이 법을 모르기도 했지만 힘없는 백성이 초특급 권력가와 정면으로 맞섰을 때 닥칠 후한이 두려워 사실상 고발을 하지 못했다. 그런데 영조의 강경한 여염집 탈취 금지령이 시행된 이후 백성들은 권력가가 실제로 처벌을 받는 장면을 목격했다. 이런 장면을 계속해서 목격하다 보니 마침내 집을 빼앗기면 상대가 양반일지라도 고발할 수 있는 용기가 생겼다. 국가와 관청에 대한 신뢰가 생겼다고 볼 수 있다.

영조는 반상의 구별이 철저했던 조선에서 ‘신분제 논리’를 이기기 위해 아주 구체적인 작은 사실, 그리고 모두가 수긍할 수밖에 없는 분명한 하나의 문제에서 출발했다. 즉, 하나의 안건이지만 근본으로 파고들면 더없이 근원적이고 오랜 개혁 과제와 연결돼 있는 일, 바로 ‘여염집 탈취’ 문제에 집중했다. 한 가지 사안에 집중했기 때문에 부작용도 어찌어찌 관리하며 끌고 나갈 수 있었다. 그 결과 영조는 조선 건국 이래 강고하게 유지돼 오던 신분제의 커다란 방벽 하나를 허물 수 있었다.

노혜경 덕성여대 연구교수 hkroh68@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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