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한편의 전쟁 다큐처럼… 주인 못찾은 ‘전선의 편지’ 1950년 그날을 증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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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4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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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민군 우편함 4640호/이흥환 엮음/348쪽·1만5000원·삼인

인민군으로 간 남편에게 집안 소식과 아들 봉석의 소식을 전하는 아내의 편지. 이 편지는 6·25전쟁 발발 직전에 쓰였는데 편지에는 7월에 면회를 가겠다는 안타까운 내용이 나온다. 삼인 제공
인민군으로 간 남편에게 집안 소식과 아들 봉석의 소식을 전하는 아내의 편지. 이 편지는 6·25전쟁 발발 직전에 쓰였는데 편지에는 7월에 면회를 가겠다는 안타까운 내용이 나온다. 삼인 제공
엮은이는 2008년 11월 미국 메릴랜드 주 국립문서보관소에서 6·25전쟁 당시 북한 인민군의 편지와 엽서 1068통을 발견했다. 미군이 평양중앙우체국에서 노획한 것으로 추정되는 이들 우편물은 신문지나 누런 마분지로 만든 봉투 안에 노획 당시의 상태 그대로 들어 있었다.

우편물을 일일이 검토한 뒤 엮은이는 이 중에서 아내가 인민군이 된 남편에게, 인민군 여전사가 고향의 어머니에게, 월북한 인민군 아들이 전라도 고향집 어머니에게, 평양의 관리가 중국 요동성의 애인에게 그리움을 전하는 편지 등 113통을 책으로 엮었다. 전쟁 발발 전후 북한과 중국 소련까지 넘나드는 편지들을 따라다니며 전쟁 속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쫓다 보면 하나의 장편 다큐멘터리처럼 읽힌다.

낱낱의 이야기는 지극히 개인적이다. 그러나 엮은이의 표현대로 ‘아무리 방대하게 편찬된 전사(戰事)라 하더라도 딱딱하고 틀에 박힌 역사서는 감히 흉내 낼 엄두조차 못 내는 생생한 육성 증언의 목소리를 들려주는’ 편지들이다.

1950년 6월 8일 자강도 만포군 고산문 춘산리 제8반에 살던 아내 홍은애는 조선인민군인 남편 강득화에게 편지를 썼다. ‘조국을 위하여 선봉대로 나선 봉석이 아버지’로 시작하는 그 글에서 아내는 자신의 안녕과 남편의 건강을 염려하며 아들의 웃음에 힘든 걸 잊고 산다고 적었다. 그럼에도 자기를 생각해줄 사람은 남편뿐이라며 애틋한 사랑을 전한다. 편지글 중 ‘칠월이 닥쳐오면 면회를 가겠으니’라는 문구는 편지를 쓴 날짜와 칠월 사이에 있는 6월 25일 때문에 더 애처롭고 안타깝게 느껴진다.

전쟁 발발 후에 쓰인 편지는 전쟁의 참상과 이념보다 중요한 가족애를 보여준다. 1950년 10월 8일 사법성 사법간부 양성소에 들어간 연수생 아내가 평남 양덕군에 있는 남편에게 쓴 편지는 ‘양성소로 오는 동안 폭격 때문에 위험했지만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을 알리는 확인서였다. 편지는 민가에 숨어 연수 교육을 받고 있는데 전시여서 춥고 배고프며 폭격 때문에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이라고 전한다. 남편에게는 군대로 오라는 통지가 없었는지 물으며 될 수 있으면 후방에서 사업을 하라는 당부도 잊지 않는다. 또 중앙당 간부들이 미국의 침공에 밀려 신의주로 도망갈 준비를 하고 있다는 비밀을 전하면서 미숫가루라도 준비해 피란 채비를 할 것을 당부한다. ‘어떡하든지 숨만이라도 붙어서 다시 한 번 그립게 만날 날을 기립시다. 할 말은 많으나 불도 없고 시간도 없고’라는 끝인사가 애잔하다.

전쟁 중이니 시골이라도 방심하지 말고 아이들을 절대 죽게 하지 말고 잘 기를 것을 당부하는 남편의 편지, 평양이 함락되기 이틀 전인 1950년 10월 7일 북쪽으로 혼자 가게 된 남편이 고향의 아내에게 ‘물건 아까워하지 말고 속히 피난하오’라고 당부하는 편지 등 절박한 심정을 담은 글도 여럿이다.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서 발견된 북한 평양중앙우체국의 소인이 찍힌 편지들. 편지봉투에 들어 있는 채로 1000여 통의 편지가 보관돼 있다. 삼인 제공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서 발견된 북한 평양중앙우체국의 소인이 찍힌 편지들. 편지봉투에 들어 있는 채로 1000여 통의 편지가 보관돼 있다. 삼인 제공
60여 년 전에 쓰인 이 편지의 주인공들은 살아 있을 가능성이 크다. 언론인 출신인 엮은이는 발신자와 수신자의 주소를 바탕으로 이들에 대한 추적을 시도했지만 성공하진 못했다. 그래서 “독자 중 편지의 주인공을 찾는다면 책을 펴낸 보람이 클 것”이라고 전했다.

엮은이는 편지글에서 풍기는 아낙의 꿋꿋한 성격이나 당시의 팍팍한 살림살이, 그들이 차마 적지 못한 애틋한 감정을 따로 읽어내 수필 같은 설명을 달았다. 크고 또박또박 쓴 편지나 흐릿하게 써서 읽기가 힘들어진 엽서에서 글쓴이가 처한 상황을 상상하는 대목은 오늘날 사라져 가는 편지글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
#책의향기#문학예술#조선인민군우편함464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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