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승의 새벽편지]무엇을 위하여 종은 울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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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2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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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승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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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은 외로운 존재다. 종각에 외롭게 매달려 누군가가 자기를 힘껏 때려주기만을 기다린다. 누가 강하게 때려주어야만 종은 제 존재의 소리를 낼 수 있다. 종은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온몸에 아무리 상처가 깊어가도 누가 종메로 힘껏 때려주기만을 기다린다. 만일 때려주기를 더 이상 기다리지 않는 종이 있다면 그것은 이미 종이 아니다. 아무도 치지 않는 종은 이미 종으로서의 존재 가치가 없다.

서울 종로 보신각종도 1년 내내 누군가가 자기를 힘껏 때려주기만을 기다린다. 외롭게 도심 한가운데에서 온갖 소음과 먼지 속에 파묻혀 한 해가 저물고 새해가 다가오기를 기다린다. 새해를 맞이하는 시민들이 자기를 힘껏 때려주어야만 비로소 제야의 종소리를 울린다. 만일 보신각종이 오랜 기다림 끝에 찾아온 고통의 순간을 견디지 못한다면 새해의 경건한 기쁨은 오지 않는다. 해마다 새해의 밤하늘에 맑고 깨끗한 종소리가 멀리 울려 퍼지는 까닭은 종 스스로 오랜 외로움과 기다림의 고통을 견뎌내기 때문이다.

지금의 보신각종은 1985년에 새로 만든 종이다. 원래 있던 종은 금이 가 국립중앙박물관에 옮겨 놓았다. 그때 그 종을 만든 종장이께서는 “금이 가고 깨어진 종을 종메로 치면 깨어진 종소리가 나지만, 완전히 깨어진 종의 파편을 치면 맑은 종소리가 난다”는 수필을 한 편 썼다. 나는 그 글을 읽고 큰 감동을 받아 내가 버린 과거라는 고통의 파편들을 다시 주워 모았다. 산산조각난 내 인생이라는 종의 파편 하나하나마다 맑은 종소리가 난다는 사실은 내 인생의 고통을 소중하게 여기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맑은 종소리 내기위해 고통 존재

법정 스님께서는 “종이 깨어져서 종소리가 깨어져도 종이다”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아무리 깨어진 종이라도 종소리를 울리는 한 종이라는 말씀이다. 내가 아무리 못나도 못난 그대로 나 자신이라는 뜻이다. 스님께서는 또 “종소리에는 종을 치는 사람의 염원이 담겨 있느냐 안 담겨 있느냐가 문제”이며, “종 치는 사람의 염원이 담겨 있다면 그 소리를 듣는 사람에게 전달된다”고도 하셨다.

나는 올해 우연한 기회에 낙산사 범종을 잠깐 쳐 보았는데 두려움 가운데서도 우리 시대의 평화를 염원하는 마음이 일었다. 그리고 몇 해 전 산불에 녹아내린 낙산사 동종의 모습도 만나볼 수 있었다. 성보박물관 유리상자 안에 보관된 동종의 녹아내리다 만 모습은 참으로 참혹했다. 그렇지만 500여 년 동안이나 널리 울려 퍼졌던 동종의 종소리만은 녹아내리지 않고 그대로 살아 있다고 생각했다. 화마에 종은 녹아내렸지만 종을 치면서 종소리에 실어 보낸 수많은 사람들의 염원마저 녹아내린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나도 인간이라는 하나의 종이다. 누군가가 나를 때려주어야만 나도 내 존재의 종소리를 낼 수 있다. 내 삶에 고통이 존재하는 것은 바로 내 존재의 맑은 종소리를 내기 위해서다. 종은 누가 자기를 힘껏 때려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기뻐하고 감사한다. 돌이켜보면 내가 지금까지 견딜 수 없는 고통에 아파하는 것도 내가 하나의 종으로서 아름다운 종소리를 내기 위함이다. 나도 이제 그 타종의 고통을 두려워하지 말고 기뻐해야 한다. 누군가가 나를 종메로 거칠고 강하게 친다 해도 머리 숙여 감사해야 한다.

우리 선조들은 종 밑에 항아리를 묻었다. 지금도 영주 부석사와 남해 금산 보리암에 가보면 범종 밑에 항아리가 묻혀 있다. 그 항아리는 제 몸을 통과하는 고통의 종소리를 맑고 아름답게 여과시키는 음관의 역할을 한다. 내가 이 시대의 종이 되지 못한다면 종 밑에 묻힌 항아리와 같은 존재라도 되어야 한다. 우울한 이 시대의 종소리를 맑게 변화시키는 음관의 역할이라도 해야 한다.

올가을 순천 송광사에 들렀다가 정오가 되자 울리는 종소리에 그대로 발걸음을 멈춘 적이 있다. 송광사의 종소리는 내 가슴속으로 끊임없이 맑게 울려 퍼졌다. 그리고 문득 김수환 추기경의 운구행렬이 빠져나가던 정오에 울렸던 명동성당의 종소리를 떠오르게 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산사의 종소리든 성당의 종소리든 종소리는 꽉 막힌 내 가슴의 길을 열어주고 먼지가 가득 쌓인 내 영혼의 공간을 눈물로 깨끗이 청소해 주었다.

희망이라는 종을 치며 한해 마감을

올 한 해 당신은 외로웠는가. 올 한 해 당신은 인생이라는 종루에 매달려 무엇을 기다렸는가. 보신각종처럼 아니면 어느 산사의 범종처럼 당신은 누가 때려주기를 기다리는 그런 숭고한 기다림의 자세를 지녀 보았는가. 내가 하나의 종이라면 내 외로움의 고통은 당연하다. 산사에 고통의 종소리가 울려 퍼지지 않으면 산사가 아름답지 않듯이 내 인생에 고통의 종소리가 울리지 않으면 내 인생은 아름답지 않다.

올 한 해를 보내며 나는 다시 나를 종 친다. 나는 진정 희망이라는 염원의 종을 치고 있는가. 종소리는 치는 사람에 따라 달라질 수 있지만 듣는 사람에 따라서도 달라질 수 있으므로 나는 진정 내 종소리를 사랑과 평화의 종소리로 듣고 있는가. 무엇을 위하여 나의 종은 울리는가.

정호승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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