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인준 칼럼]나경원과 박원순의 승부, 그 후

배인준 주필

그제 저녁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야권(野圈) 서울시장 단일후보가 된 박원순은 스스로 감동하는 것 같았다. 그럴 만도 하다. 10년 집권 경험이 있는 제1야당 민주당이 자존심도, 정당정치의 기본도 버린 채 후보 단일화에 나섰지만 시민정치의 간판스타인 자신에게 굴복한 순간이었다.

쇼 같은 정치, 범좌파가 더 능하다

박원순 박영선 최규엽 간의 예선전은 잘 짜여진 단막극처럼 깔끔하게 치러졌다. 야권은 이번 단일화극 성공으로 ‘단일화 공식(公式)’ 굳히기에 자신감이 더 붙었을 것이다. 손학규를 비롯한 민주당은 정권 탈환 주도세력의 위상에 큰 상처를 입었지만, 한나라당이야말로 옆집 걱정할 처지가 못 된다.

내년 대선의 범좌파 단일후보는 더욱 극적으로 탄생할 것이다. 야권은 흥행 노하우를 알 만큼 경험을 쌓았다. 단일화를 민주당이 주도하건, 시민단체가 주도하건, 특정인물이 주도하건 정치의 관객인 보통 국민한테는 별로 중요치 않다. 재미가 있으면 빠지고, 흥분할 요소까지 있으면 금상첨화다.

정치가 쇼냐고 한다면 답은 쇼 맞다. 사기성(詐欺性)은 있지만 ‘위대한 탄생’ 같은 오디션 흉내라도 내면 눈길을 끌고, 출연자들은 더 큰 인물로 보이는 착시현상도 만들어낼 수 있다. 이번 경선에서 진 박영선도 정치인으로 손해 본 장사는 아니었지 싶다. 범우파 시민후보로 추대됐던 이석연의 도중하차는 그런 점에서 허전한 대목이다.

지금의 한나라당은 국민을 흥분시키기는커녕 하품 나게 한다. 한나라당과 범우파 시민그룹은 한판 쇼조차 못하는 체질을 이번에 또 드러냈다. 이들은 아무리 봐도 힘을 모으고 바람을 일으키는 데 서툴고 둔하다. 일단 큰 선거에서 이길 생각부터 해야 할 텐데 각자 탐욕에 빠져 너무 타산적이고 자기희생에 인색하다.

야권 사람들은 막후에서는 서로 으르렁대고 경쟁하면서도 무대 위에서는 자주 얼굴을 맞대고 껴안고 비비고 하는데, 한나라당과 범우파 사람들은 무슨 권위와 체면이 있다고 한편끼리 고답적이고 냉랭하다. 당 내부 소통, 파벌 내 소통도 안 되는 판이니 표를 가진 국민과 잘 소통될 리 없다. 내년 대선까지 같은 양상일 때 여권(與圈)은 흥행 면에서부터 지고 들어갈 것이다.

10·26 재·보선은 서울시장뿐 아니라 서울 부산 대구 충남 충북 전북 경남 경북 강원 등에서 일부 기초단체장을, 그리고 전국에 걸쳐 광역 및 기초 의원을 뽑는 선거다. 사실상 전국의 표심을 고루 읽을 수 있어 내년 총선과 대선의 축소판이요 실험장이다. 이번 재·보선의 과정과 결과는 내년 총·대선에 투영될 것이 틀림없다. 당장은 나경원과 박원순의 승부지만 결국은 박근혜 손학규 문재인 등의 희비(喜悲)를 가를 것이다.

범우파, 자유민주주의 지켜낼까

민심의 향배는 이미 정해진 부분도 있겠지만 아직 부동층이 적지 않다. 그렇다면 여권과 야권이 지금부터 3주 동안 얼마나 유효한 선거 전략과 진영 내 결속력으로 선전(善戰)하느냐에 따라 선거결과가 달라질 여지는 있다.

이번 선거는 순수한 시민운동에 마침표를 찍는 계기도 됐다. 좌파의 박원순은 야권 단일후보에 올라섰고, 우파의 이석연은 도중하차했다는 차이가 있지만 아무튼 좌·우파 시민운동권 모두 정치예비군이 돼버렸다. 기왕에 정치운동권으로 변했다면 우파도 어정쩡한 태도를 버리고 좌파만큼 치열하게 우파의 가치 실현을 위해 구체적 노력을 하는 것이 당당하고 의미 있다.

범우파는 이번 선거와 내년 총·대선에서 범좌파가 승리하면 대한민국 헌법정신이자 발전원리인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법치’가 와해되는 지경에 이를 것이라고 걱정한다. 범좌파의 여러 세력 중에는 주체사상파 종북세력, 비주사(非主思) 자주파(NL), 반(反)자본주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세력, 상대적으로 온건한 사회민주주의 세력, 비판적 자유민주주의 세력 등이 거의 무지개 색처럼 섞여 있는 게 사실이다. 김일성 왕조 숭배세력까지 연합정권의 일원으로 발을 들여놓는다면 경제적으로 북한을 압도한 대한민국이 정치적으로 북한의 하위체제로 전락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고 우파에선 불안해한다.

이 같은 우려에 현실성이 있다면 뒷전에서 개탄만 할 일은 아니다. 범우파가 재집권하더라도 지금의 시대흐름으로 볼 때 좌우를 아우르는 중도(中道)주의는 불가피할지 모른다. 그러나 박근혜를 비롯한 우파는 자유민주주의를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자유민주주의를 변질시켜 사회주의에 가까운 사회민주주의, 더 나아가 인민민주주의 체제로 갈 위험성이 있다면 이를 막기 위한 대동단결은 명분이 충분하다. 문제는 행동력이다. 범우파 사람들이 개인의 입신양명에나 매달리며 분열을 거듭한다면 너나없이 패배자가 될 뿐 아니라 곧 역사의 죄인이 될 날을 맞을 것이다.

배인준 주필 injo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