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칼럼/이은별]숲의 향기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9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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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별 시인
이은별 시인
숲이라면 흔히 7, 8월 한여름의 나뭇잎 무성한 산을 일컫기 십상이다. 지리산 숲, 한라산 숲 등등. 겨우내 마른 가지들이 짙푸른 색깔로 물들여져 울울창창하기에 안 그렇겠는가. 이를테면 땡볕을 이고 사는 숲이다.

한데, 그 땡볕의 숲보다 한겨울의 숲을 나는 더 좋아한다. 숲의 향기가 훨씬 진하고 신선해서다. 그래서 평소에도 늘 친구로 여기곤 하지만, 지지난해에는 겨울 숲에 푹 빠진 적이 있었다. 눈설레가 갠 어느 날 산책이나 하자고 무작정 집을 나서서 걸었다. 걸음이 어찌나 가볍던지 도심을 벗어났는가 싶었는데 이미 산문(山門)을 지나 숲에 들어 있었다.

들길을 한참 걷는데 눈높이에 울창한 숲이 펼쳐져 있었던 것이다. 수없이 보아 온 숲이었지만 그날따라 좀 다르게 느껴졌다. 한여름 땡볕의 숲보다 색채가 더 밝고 선명했다. 마치 내가 나무들 일부가 된 것 같았다. 평소에 보던 나무의 단조로운 모습이 아니라 생생하게 깨어 있는 나무들이라고 인식되는 순간이었다. 그 깨침인즉 바로 생명의 신비 속에서 영혼의 향기를 건져 올리는 듯싶었던 것이다.

우거진 숲의 틈새를 맑은 햇살이 비집고 들어왔다. 넌지시 올려다보자 그 하늘이 파랗게 반짝였다. 나는 살갑게 웃으며 춤이라도 추듯 한 바퀴 빙 돌았다. 그런 나를 숲은 전혀 탓하지 않았다.

이윽고 숲길을 걸었다. 순간 맑은 햇살을 향해 내 몸이 붕 뜨는 것 같았다. 참으로 신기하고, 새로운 발견이었다. 내 영혼이 숲의 향기에 감싸여 얼마나 안온하던지, 그 현상이야말로 ‘소유’가 아니라 ‘비움의 존재’라는 걸 일깨워 준 숲의 값진 선물이었다.

울창한 숲 거닐며 일상 되돌아봐

그렇다. 내게 겨울 숲에 드는 일은 그 자체의 기쁨보다는 평소 고루해지기 쉬운 일상을 새삼 돌아보게 한다. 그래서 겨울 숲이라면 자작나무숲이 그만이라는 것도 익히 아는 터다. 다른 여느 숲에서보다 자작나무숲에서 얻는 성찰은 ‘밖의 풍경’이 아니라 ‘내 안의 풍경’에 반하는 다시없는 기회가 된다고.

자작나무는 한겨울에 잎을 다 떨어뜨린 후 하얗게 드러내는 알몸에서 더욱 빛이 나고, 향기 또한 짙다. 오래전 영화 ‘닥터 지바고’에서 보았듯이, 또 강원도 응봉산 자락의 자작나무숲에서도 보듯이 자작나무의 짙고 어둑한 숲에서 순백으로 빛나는 풍경이야말로 눈부시다 못해 마치 반야심경(般若心經)을 외는 가슴만큼이나 처연해진다. 그 고결해 보이는 풍경에서 얻는 독백과 위로와 향기인즉 자작나무숲의 매력,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의 바탕이 그러하리니.

몇 해 전 울릉도에 다녀왔다. 울릉도의 숲에는 그 나름의 향기가 독특했다. 성인봉 아래에 섬피나무와 너도밤나무 등의 희귀식물들로 이뤄진 숲의 섬, 참으로 신선하고 신비로웠다. 산새들의 아침을 여는 소리에 단잠 깨고, 대나무숲을 지나며 동자승 경 읽는 소리 들리는 듯한 깨침에 숲의 향기가 가슴속 깊숙이 스며들더라니. 인생살이 참모습이 ‘색즉시공’에서 끝나지 않고 ‘공즉시색’에서 마무리되는 것임을 성인봉 기슭에서 새삼 깨달을 줄이야.

그러고는 또 백령도 숲에 다녀오는 기회도 있었다. 서해의 최북단 한바다에 떠 있는 섬, 북한의 장연 땅이 눈앞 10km에 바라보이는 섬의 숲, 그 향기엔 진한 소금기가 묻어났다. 하여, 몽운사(寺) 숲길에서는 섬사람들 훈김으로 내 시적 감성이 적잖이 깨어났으니까. 산책길에서 또는 여행길에서 숲에 들어 그 독특한 향기에 깊은 숨 들이쉴 수 있음은 얼마나 다행일까, 그때마다 속도 비워내고.

숲의 향기란 그렇듯 사람에게 전이되어 그 가슴 속속들이 씻어 준다. 그때 그에게서는 ‘사람 냄새’가 난다. 지혜로운 삶의 일상에서 맡는 그런 냄새다. 지혜로움이 무엇인가? 명예에 대한 욕심, 재물에 대한 욕심, 그것들이 다 헛것이라 깨닫고 속을 비워내는 일이다. 이야말로 숲의 향기 못잖게 소중한 ‘사람의 향기’요 ‘지혜의 숲’이다.

“새벽녘 꿈길에서 돌아오는 길/갈대꽃이 흰 눈인 듯 부셨는데/禪定에서 깬 한낮이 왜 침침할까/저 산솔새들이 혹여 눈여겼으랴마는/버리고 비워서 온갖 것 다 비웠거니/애써 갈고 닦은 마음공부/말로 어이 다하리/스승의 지혜로운 詩論 그 숲이었네//가슴 가득 流水의 향기 염화미소여” 졸작 ‘지혜의 숲’이 문득 떠올려진 것은 대청도로 가는 뱃전에서였다. 내친김에 그날 나는 백령도를 거쳐 대청도마저 둘러보며 숲의 향기를 듬뿍 안고 돌아왔었다.

세상의 모든 욕심 말끔히 비워내

백령도에서도 대청도에서도, 새벽녘 이슬 한 모금에 돋을볕 타 마시자 하늘이 상서로이 웃어 주었다. 그리고 숲길에 들어서는 코끝 간질이는 향기 좇으며 한낮의 별을 아름껏 줍기도 했다. 오랜만의 새뜻한 나들이였다.

산이 있고 강이 있고, 다시 길을 건너면 숲에 다다른다. 무심코 바람 한 번 쐬고 싶을 때, 가벼운 마음으로 훌쩍 다녀오고 싶을 때 숲을 찾아 길을 나서라. 안성맞춤의 여행이 될 것이다.

이은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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