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란의 가르침 가슴에 새기며… 원수를 치료하는 트리폴리 어느 女의사의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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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9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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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척 3명이 카다피군에 목숨 잃었다… 부상용병을 볼때마다 피끓는 복수심이
“당장 죽이고 싶다” 수차례 되뇌면서도… ‘원수라도 동등하게’ 꾸란을 어길 수 없었다

8월 31일 리비아 트리폴리에서 가장 큰 병원인 살라에딘 병원의 6인실 병실. 기자가 병실에 들어서자 흑인 환자들의 까만 눈동자가 일제히 쏠렸다. 왼쪽 가운데 침대에 누운 남자에게 갔다. 양 다리에 붕대를 친친 감고 있었다. 왼팔에는 링거액을 꽂았다. 오른팔에는 어딘가에 긁힌 자국도 보였다. 아프리카 차드에서 왔다는 30대 환자에게 “어쩌다 다쳤냐”고 물었더니 “1년 전 리비아로 건너와 일하다가 보름 전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말했다. 그때 지나가던 여의사가 갑자기 끼어들며 강한 아랍 억양의 영어로 말했다. “믿지 마세요. 모두 거짓말이에요.”

이 여의사는 올해 35세인 무함마드 이남 씨. 트리폴리에서 태어나 떠나본 적이 없는 그는 이 병원에서 12년째 외과의사 생활을 하고 있다. 보수적인 아랍 국가의 몇 안 되는 여성 인재로서 자부심을 갖고 살아온 그의 인생은 리비아 시민혁명으로 달라졌다.

그의 삶에 변화가 생긴 것은 올 2월부터였다. 병원에 갑자기 환자들이 들이닥치기 시작한 것. 군인에게는 적군과 아군이 있겠지만 위급한 환자에게는 적군 병원과 아군 병원이 따로 없는 법. 카다피 정부군과 반군 할 것 없이 부상자들은 모두 이 병원으로 몰렸다. 전황에 따라 분위기도 달라졌다.

이남 씨는 집에서 몰래 위성을 이용해 외국방송을 봤다. 도심에 모인 거대한 인파, 총에 맞아 길거리에 쓰러져 있는 사람들…. 국영TV에선 절대 볼 수 없던 장면이었다. 이남 씨는 “그땐 정말 이 나라가 싫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정말 필요한 일이 아니면 집 밖으로 나오지도 못했다. 병원에 다니는 것도 겁이 나긴 마찬가지였다. 총칼로 무장한 군인들도 병원에 수시로 찾아와 “반역자들이 병원에 실려 오면 절대 치료해주지 말라”고 윽박질렀다. 병원을 찾아온 환자들은 하나같이 “군인들이 우리에게 사정없이 총을 쐈다”고 말했다. 군인들이 왜 그런 짓을 하는지 이남 씨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결국 이남 씨도 카다피군에게 어머니의 사촌과 삼촌 등 친척 세 명을 잃었다. 모두 병원 인근 동네에서 저격수의 공격을 받았다. 주변 이웃들도 대부분 한 명 이상의 가족을 잃었다. 어떤 집은 서너 명씩 죽어나갔다. 이남 씨 동료도 네 명의 자녀를 한꺼번에 잃었다.

“병원으로 실려 오는 정부군 용병들을 볼 때마다 피 끓는 복수심에 불타올랐어요.”

이남 씨는 당시의 솔직한 심정을 기자에게 고백했다.

용병들은 사람을 죽인 대가로 카다피 정권에서 하루 1000∼3000디나르(86만∼250만 원)씩 받았다. 그런데 정작 치과의사 자격증을 가진 이남 씨의 여동생은 4년간 일자리를 구하지 못했다. 남동생도 실직자다. 카다피는 석유를 팔아 번 오일머니로 경제를 살리기는커녕 자국민을 죽이는 데 갖다 쓰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들에 대한 현지인들의 적개심을 익히 알고 있는 용병들은 병원에 와서도 자기는 용병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이들은 “교통사고를 당했다” “총은 만져보지도 못했다”고들 말하지만 의사들은 다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지금 용병들의 최대 관심사는 치료를 잘 받고 나서 리비아인의 눈을 피해 본국으로 ‘탈출’하는 것이다.

내전이 격화되자 이번에는 반군 환자가 늘기 시작했다. 정부군 반군 환자가 섞이기 시작하면서 응급처치 후엔 서로 다른 방에 격리해 입원을 시켰다. 이들은 치료를 받고 나가면 또 서로를 죽였고 다시 병원에 오기를 반복했다. 같은 국민들끼리 총부리를 겨눠야 하는 현실이 너무 싫었다. 지난 6개월간 TV를 보면서 매일 눈물을 흘렸다.

의사의 길과 인간적 감정 사이에서 번민하던 이남 씨의 고통을 잡아준 것은 꾸란이었다. 그는 매일 “아무리 적일지라도, 원수일지라도 동등하게 대해야 한다”는 꾸란의 구절을 가슴에 새기며 일터로 나간다. 지금 602호에는 차드, 수단, 니제르 출신 정부군 용병들이 입원해 있다. 정부군의 수를 다 헤아리면 이 병원에만 100명 안팎이다. 내 가족과 이웃, 친구들에게 총질을 한 사람들이지만 이남 씨는 동등하게, 최선을 다해 치료해주고 있다.

“정부군 환자들을 지금 당장에라도 죽이고 싶다”는 솔직한 심정을 기자에게 수차례 반복하면서도 이맘 씨는 용병 환자들에게 다가가 “불편한 데는 없느냐”고 물으며 환부를 살폈다.

트리폴리=유재동 기자 jarret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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