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100년 전엔 거들떠보지도 않던 이 그림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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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4월 3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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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에 따른 색의 변화 표현한 인상파… 혹평 딛고 ‘블루칩’ 되는 과정 그려◇인상파 그림은 왜 비쌀까?/필립 후크 지음·유예진 옮김/312쪽·1만8000원·현암사

루브르 박물관은 프랑스 파리를 찾는 여행객의 필수 관광 코스. 그러나 처음 방문하는 사람들은 박물관에 들어서는 순간 길을 잃는다. 어디서 무엇부터 봐야 하는지 감을 잡기 어려울 정도로 큰 규모 때문이다. 기를 쓰고 인파를 헤쳐가면서 ‘모나리자’를 보고 나면 다른 작품을 찬찬히 둘러볼 육체적, 정신적 여유를 잃어버리기 일쑤다. 이런 경험을 한 뒤 센 강 건너편 오르세 미술관에 가면 마음이 한결 편해진다. 일단 규모가 적당하다. 더욱이 걸려 있는 작품들이 주는 편안함이 지친 여행객을 달래준다. 이곳에 집중적으로 전시된 작품은 19세기 인상주의 회화들이다. 이처럼 인상파 회화는 현대인들에게 ‘편안’하게 다가간다.

하지만 처음 등장했을 때 인상파 회화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지금과 크게 달랐다. 당시 평론가들은 오늘날 현대미술에 붙는 수식어인 ‘전위적’ ‘실험적’이란 단어로 이들 작품을 평가했다. 대중은 그림에서 불편함을 느꼈고, 기존의 미술 전통을 위협하는 ‘위험한’ 시도로 받아들였다.

1892년 2월 드가의 ‘압생트’가 영국 런던 크리스티 경매장에 모습을 드러내자 입찰자들은 야유의 휘파람을 불어댔다. 누추한 차림의 남자와 대낮부터 술을 마시는 여자가 선술집에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을 그린 이 그림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됐던 것이다.

고흐가 자신을 치료하고 후원했던 의사 폴 가셰를 그린 ‘가셰의사의 초상’. 이 작품은 1990 5월 미국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8250만 달러에 팔렸다. 당시 이 작품을 구입한 일본 다이쇼와 제지회사의 료에이 사이토 회장은 “내가 지금 사지 않는다면 이 작품은 일본에 절대로 올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현암사 제공
고흐가 자신을 치료하고 후원했던 의사 폴 가셰를 그린 ‘가셰의사의 초상’. 이 작품은 1990 5월 미국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8250만 달러에 팔렸다. 당시 이 작품을 구입한 일본 다이쇼와 제지회사의 료에이 사이토 회장은 “내가 지금 사지 않는다면 이 작품은 일본에 절대로 올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현암사 제공
그로부터 100년쯤 지난 1994년 6월, 영국 런던에서 열린 경매에서 모네와 마네의 작품 한 점씩이 각각 400만 파운드(현재 가치로 약 876만 달러) 이상에 낙찰됐다. ‘데일리 메일’은 아바의 히트곡을 연상시키는 ‘마네, 모네, 머니(Manet, Monet, Money)’라는 제목으로 그날의 경매를 대서특필했다. 한 세기 만에 인상파 회화에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소더비, 크리스티 등을 거치며 30여 년 동안 아트 딜러로 일한 저자가 쓴 이 책은 이런 궁금증을 풀어준다.

19세기 후반 프랑스 인상파 화가들은 미술에 극적인 혁명을 일으켰다. 그들은 세부 묘사보다 전체적 효과에 초점을 맞췄다. 심혈을 기울여 빛과 반사를 관찰했고 가장 즉각적이며 직접적으로 눈에 보이는 것만 그렸다. 당시 파리의 보통 사람들은 장 레옹 제롬 등으로 대표되는 살롱전 화가들의 보수적인 색감, 즉 매번 다르게 보이는 색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는 대로 그려진 색감에 익숙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눈앞에 있는 인상파 그림들에 당황했다.

소설가 에밀 졸라는 인상파 그림을 보고 받은 충격을 1886년 자신의 소설인 ‘작품’에서 이렇게 썼다. ‘전에 없는 빛의 연출 방식에 관람객들은 마치 자신이 모욕받은 것처럼 느꼈다. 나이 든 사람들은 들고 있던 지팡이를 휘둘렀다. 과연 예술이 이렇게까지 성을 돋우는 것이 타당한가.’

이런 인상파 회화가 대중에게 파고들기 시작한 것은 시대의 변화 덕분이었다. 대중과 화가에게 막강한 영향을 미치는 ‘사업가 딜러’가 등장한 것이다. 철도의 발전도 인상주의에 힘을 실어줬다. 풍경 화가들은 도시에 거주하면서 시골로 여행하는 것이 수월해졌고 그로 인해 훨씬 빠른 시간에 많은 작품이 나왔다.

르누아르의 ‘특별 관람석’은 인상파 회화가 걸어온 길을 보여준다. 1875년 3월 진행된 경매에서 220프랑(현재 가치로 약 500달러·53만 원)에 낙찰됐던 이 그림은 2008년 2월 한 경매에선 1480만 달러(약 158억 원)에 팔렸다.
르누아르의 ‘특별 관람석’은 인상파 회화가 걸어온 길을 보여준다. 1875년 3월 진행된 경매에서 220프랑(현재 가치로 약 500달러·53만 원)에 낙찰됐던 이 그림은 2008년 2월 한 경매에선 1480만 달러(약 158억 원)에 팔렸다.
이러는 사이 서서히 이들 작품에 대한 평가도 바뀌었다. 1879년 평론가 폴 드샤리는 드가의 작품에 대해 ‘처음에 봤을 때는 매우 거북하지만 차차 익숙해진다’고 썼다. 인상파 화가들이 몰고 온 새로움이 주는 충격, 즉 밝은 색채, 낯선 구도, 거친 처리에 사람들이 서서히 적응한 것이다.

당시 인상주의를 받아들이는 각국의 차이도 상세히 설명하며 각국 역사와 국가 간 역학관계 등을 고려한 흥미로운 고찰을 펼친다. 시기별로 보면 1890년대에는 프랑스와 미국에서, 1910년대에는 독일과 스위스에서, 그리고 1920년대에 와서야 영국에서 인상주의를 받아들였다. 미국에서 인상주의가 빨리 받아들여진 것은 프랑스 문화를 동경한 신생국가 국민들의 성향 때문이었다. 미국인은 파리를 이상향으로 여겼고, 인상주의처럼 새롭고 충격적인 움직임을 다른 유럽 국가들보다 훨씬 수월하게 수용했다.

이에 반해 보수적 성향의 독일 지배층은 문화적 라이벌인 프랑스의 새로운 움직임에 적의를 드러냈다. 독일의 보수주의자들은 인상파 회화를 즐기는 것이 기존의 질서 체제를 위협한다고 받아들였다. 황제까지 나서 남성적 혹은 독일적이지 않은 모든 형태의 예술을 엄격히 금하는 정책을 펼쳤다.

오랫동안 프랑스와 전쟁을 치렀던 영국 역시 인상주의에 매우 비판적이었다. 1868년 리즈에서 개최된 국제 예술 전시회를 보도한 ‘런던 아트 저널’은 출품작 중 프랑스 풍경화가 단 한 점도 팔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통쾌하다는 듯이 전했다.

이처럼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까지 프랑스 인상주의에 대한 반응은 각양각색이었다. 하지만 1950년대 들어 세계가 안정을 찾으면서 부가 증대하자 개인의 기쁨이 중시되기 시작했다. 인상파 회화의 가격은 급등세를 탔다.

오늘날 인상파 회화는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부자들의 노리개’가 됐다. 신흥 부자들은 부를 과시하는 데 르누아르나 모네의 그림을 벽에 걸어 놓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고 생각한다. 인상파 회화를 소장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미적 취향과 경제적 힘을 동시에 증명하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인상파 작품의 가치는 꾸준히 높아질 것으로 저자는 예상한다. 시장에 거래되는 인상파 작품 수가 한정돼 있고 오랜 기간에 확립된 작품에 대한 신용도 덕분이다. 한마디로 오늘날 인상주의 회화는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우량주’인 것이다.

금동근 기자 gol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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