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칼럼/윤고은]결혼은 모험? 모험없는 동화 봤나요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4월 30일 03시 00분


코멘트
윤고은 소설가
윤고은 소설가
궁금한 것은 언제나 웨딩케이크였다. 결혼식의 주인공들이 3단 케이크를 조심스럽게 자르고 나면 그 케이크는 어디로 가는지 결말이 궁금했다. 나는 하객 입장에서도, 친지 입장에서도 케이크의 결말을 알 수 없었다. 케이크는 과연 어디로 가는 것인가, 누가 먹어치우는 것인가, 식장 소유 소품인 것인가.

일주일 후 나는 그 궁금증을 풀 수 있을 것이다. 상상의 필름을 너무 많이 돌린 나머지 주인공들의 우아한 칼질 아래 케이크가 땅이 요동치듯 무너진다든지, 칼이 중간에 동강난다든지 하는 망상도 몇 차례 지나가지만 그 빛깔 예쁜 케이크가 어떤 맛인지 확인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식을 마친 신부가 그 케이크에 대한 자신의 호기심을 잊어버리지만 않는다면 케이크는 신부의 혀 위에서 녹고 있을 것이다.

웨딩케이크의 결말을 일주일 앞두고 나는 영국 왕실의 결혼을 구경한다. 결혼을 준비하면서 많이 보게 되는 것은 나 아닌 다른 신부들의 모습이다. 미용실과 드레스, 촬영스튜디오를 고를 때 자연스레 샘플을 보게 되는데, 샘플 속에는 이미 수많은 신랑신부가 웃고 있다. 주말에 스튜디오 촬영이라도 한다면 미용실에서부터 수많은 하얀 옷의 신부들을 보게 될 것이다. 주말에 결혼이라도 한다면 (대부분 그렇듯이) 미용실에서부터 다른 신랑신부들 사이에서 자신을 구별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많은 주인공을 보다 보면 지구가 결혼을 축으로 해서 돌아가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지구촌 축하 받은 英왕세손 결혼식

그런 점에서 윌리엄과 케이트 역시 샘플책자나 미용실 옆 의자에서 보았던 수많은 신랑신부의 하나일 뿐이다. 그들 역시 결혼으로 지구의 한 축을 감당하고 있다. 그들의 결혼이 대중의 관심을 끄는 것은 그들의 이름 앞에 붙은 혹은 붙을 칭호 때문이지만 그 칭호를 걷어내고서도 그들의 결혼은 여전히 유효하다. 더군다나 아주 모처럼, 혹은 처음으로 보는 어린 청춘들의 왕실 결혼이기 때문에 더 관심이 간다. 이 결혼식을 보기 위해 버킹엄궁 앞에 텐트를 친 사람들도 있다는데, 전 세계가 하객이 되는 그 열기가 주인공들에게는 기쁨인 동시에 부담일 것이다.

영화 ‘킹스스피치’에는 연설을 앞두고 말더듬이 증세 때문에 고민하는 왕이 등장한다. 그 영화를 보고 왕좌라는 것은 누군가에게 귓속말을 하려고 해도 귀 대신 몽둥이만 한 마이크가 다가오는 공간이 아닐까 생각했다. 윌리엄과 케이트는 유창하게 말하지만 그들에게도 마이크 아닌 귀가 필요한 순간이 있을 것이다. 말을 더듬지는 않아도 최대한 의식해서 표현하게 될 것이고, 그렇게 걸러지지 못한 말들은 성대 아래 쌓여 있을 것이다. 그 성대 안의 말들을 가만히 더듬어 줄 수 있는 것이 바로 두 사람 ‘서로’가 아닐까. 두 사람이 오래 만나다가 짧은 공백을 거쳐 다시 부부의 연을 맺기까지는 그 내면의 귀가 큰 역할을 했을 거라 생각한다. 그리고 두 사람 역시 알고 있을 것이다. 로열패밀리, 신데렐라, 왕족과 평민, 왕위계승 서열 2위라는 단어들과 함께 다이애나 비의 이름까지 거론되는 이 거창한 결혼식에서 사람들이 가장 기대하는 것은 두 사람의 로맨스다. 전 세계가 생중계를 하고, 궁 앞에 텐트까지 등장하는 상황에서 이 동화 같은 하루의 핵심은 두 사람의 마음에 있다. 사람들은 그 마음을 엿보길 원한다.

웨딩드레스는 혼자 입는 옷이 아니다. 입을 때도 누군가가 필요하며, 움직일 때도 누군가가 필요하다. 계단을 오르내리려면 드레스 자락의 건강상태 같은 것은 포기하든지, 아니면 누군가가 끝자락을 들어주든지 해야 한다. 확실히 동선의 제약을 받는 옷이지만 그 옷을 입은 순간 나는 생각했다. 인간에게 동선이 꼭 필요한가 하고. 그리고 어느 순간 깨달았다. 내가 자꾸 골라대던 드레스의 디자인이 어디서부터 온 것인지를. 유년기에 좋아했던 인형(이름이 ‘판타지아’였다)이 무의식적 취향의 출처였다. 그 인형이 입고 있던 드레스의 디자인이 25년쯤 지나 지금 내 머릿속에서 몰래 지휘하는 것이다. 유년의 동화는 그렇게 부활한다.

신데렐라의 탄생, 동화가 현실로

결혼 소식을 알리자 ‘명복을 빕니다’라든지, ‘위로주 한잔 받으시죠’ 같은 농담이 따라왔다(그들은 농담이 아니고 진담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누구든 부인할 수 없는 것은 결혼이 우리 인생의 반짝이는 몇 순간을 만든다는 사실이다. 결혼 이후 태어나는 것은 아이만이 아니다. 결혼은 모험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당연한 이야기다. 모험이 없는 동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형태와 방식이 다를 뿐 모든 동화에는 모험이 도사린다. 나는 유년의 ‘판타지아’가 현실이 되는 것을 숨죽이고 보고 있다. 윌리엄과 케이트의 동화도 그럴 것이다. 그들의 결혼식에는 비스킷 1700개와 초콜릿 17kg을 사용한, 왕실의 비밀 레시피를 이용한 웨딩케이크가 등장한다. 일단 나는, 그 웨딩케이크가 공개된 후 어디로 옮겨지는지 그 결말을 지켜볼 생각이다.

윤고은 소설가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