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학]신라 황금보검, 2만리 밖 체코 칼 닮은 까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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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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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는 변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지나간 사건들도 인식의 변화를 겪는다. 역사 연구가 가지는 중요한 의의도 여기에 있다. 공학박사인 저자는 역사를 과학의 시선으로 되짚었다. 우리 역사 속에 등장하는 과학과 기술 지식은 서양의 그것에 비해 결코 뒤떨어지지 않았음을 밝힌다.》

다뉴세문경
다뉴세문경
우리의 과학적 지식이 서양에 비해 뒤처진다고 느껴온 것은 그만큼 우리 역사 속의 과학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고, 연구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과학 삼국사기’와 ‘과학 삼국유사’는 그렇게 나온 쌍둥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사건과 물건을 놓치지 않고 우리 역사 속의 과학성을 풀어내는 실마리로 삼았다. 역사에 나타난 우리 민족의 과학적 우수성뿐만 아니라 당대 문명의 교류 등도 함께 추론해 인문학과 과학의 결합을 시도한다.

고대사회에서 거울은 주술적 성격이 강했고, 도교와 불교 등 종교가 도입되면서 종교적 장신구가 된 뒤에도 여전히 신묘한 물건으로 간주됐다. 삼국사기 궁예 편에는 청동거울이 국가의 미래를 알려주는 신기한 역할을 하는 도구로 묘사돼 있다.

국보 제141호인 다뉴세문경(국보경)은 기원전 4세기 청동기 시대에 만들어진 거울이다. 한 면은 거울이고 반대 면에는 끈을 넣어 맬 수 있도록 만든 꼭지가 두 개 붙어 있다. 꼭지가 있는 면의 가는 줄무늬가 과학적 관심의 대상이 됐다. 다뉴세문경의 크기는 지름이 21.2cm인데 이 좁은 공간에 1만3000여 개의 정교한 선이 0.3mm 간격으로 그려져 있고, 100개가 넘는 크고 작은 동심원이 들어 있다. 선과 골의 굵기는 약 0.2mm, 골의 깊이는 0.07mm로 한 곳도 빈틈없이 새겨져 있다. 원을 그릴 때 다치구(원을 한꺼번에 그릴 수 있는 정교한 컴퍼스 같은 도구)를 활용해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데 1cm 길이에 약 20개의 바늘을 박아야 하는 다치구를 정밀기계의 도움 없이 어떻게 만들었는지도 불가사의다.

더욱 놀라운 것은 정교한 문양을 가진 이 거울이 청동을 녹여 틀에 부어서 만든 주물제품이라는 점이다. 구리와 주석의 비율은 65.7 대 34.3으로 반사 능력을 높이면서도 인장 강도를 훼손하지 않는 이상적인 비율로 제작돼 있다. 선조들은 모래를 이용한 거푸집을 이용해 이렇게 정교한 청동주물 제품을 만들었지만 지금도 이를 완벽하게 복원하지 못하고 있다. 확대경도, 정밀한 제도기구도 없었던 2500여 년 전에 우리가 정교한 주물품을 만들 정도로 우수한 청동기술을 보유했다는 증거다.

과거는 변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지나간 사건들도 인식의 변화를 겪는다. 역사 연구가 가지는 중요한 의의도 여기에 있다. 공학박사인 저자는 역사를 과학의 시선으로 되짚었다. 우리 역사 속에 등장하는 과학과 기술 지식은 서양의 그것에 비해 결코 뒤떨어지지 않았음을 밝힌다.
과거는 변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지나간 사건들도 인식의 변화를 겪는다. 역사 연구가 가지는 중요한 의의도 여기에 있다. 공학박사인 저자는 역사를 과학의 시선으로 되짚었다. 우리 역사 속에 등장하는 과학과 기술 지식은 서양의 그것에 비해 결코 뒤떨어지지 않았음을 밝힌다.
세계 고대 천문학계는 개 뱀 전갈 등의 그림이 그려져 있는 기원전 1200년경 메소포타미아 유역의 바빌로니아 토지 경계비를 별자리의 원형으로 보고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고대 천문학의 발상지로 인정하고 있다. 그런데 이보다 1800년 앞선 대동강 유역의 고인돌에서 천문도가 발견된다. 평양의 고인돌 무덤 중에는 뚜껑돌에 홈이 있는 것이 200여 기나 된다. 처음에는 족보이거나 가상의 별들로 해석됐지만 당시의 별자리를 그린 성좌도로 밝혀졌다. 평안남도 증산군 용안리에 있는 10호 고인돌 무덤에 있는 별자리 그림은 세차운동을 감안해 연대를 측정하면 기원전 2800년경(±220)의 하늘로 추정된다.

책은 옛 기술을 분석한 뒤 역사적 추론도 가미한다. 1973년 경주의 미추왕릉지구 계림로 14호분에서는 보물 635호인 태극문양이 새겨진 황금보검(5∼6세기 제작 추정)이 발굴됐는데, 그 양식이 로마의 기법으로 만들어져 고고학계를 놀라게 했다. 금 입자와 금 세선을 사용해 금제품의 표면을 장식하는 그리스에서 발달한 누금세공의 기술이 적용된 것이 특징이었다. 황금보검 형태의 칼은 지금의 체코나 폴란드 지방에서 많이 제작됐는데 이곳과 약 8000km나 떨어진 경주에서 발견된 것은 당시 동유럽을 지배했던 훈족과 신라가 특별한 관계에 있었기 때문이라는 주장을 펼친다. 세계 각지에서 발굴된 유물과 사료에 의하면 훈족과 한민족은 친연관계에 있었다는 것이다.

신라에서 술잔을 띄워 풍류를 즐기던 포석정의 경우 소용돌이 현상을 정교하게 이용한 설계이며 이는 일반적 공학에서는 소용돌이 현상이 발생하지 않도록 설계하는 것과 비교할 때 독창적인 부분이라고 설명한다.

고구려가 만주를 중심으로 광활한 영토를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뛰어난 철기문화를 바탕으로 개마(鎧馬)무사 부대를 운영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무사뿐만 아니라 말에게까지 갑옷을 입혀 전투에 임했던 고구려는 오늘날의 탱크 역할을 하는 개마무사들로 적진의 진영을 단번에 무너뜨릴 수 있었다는 설명이다. 당시 갑옷의 탄소함유량 등을 분석해 철의 강도를 비교하고 제작 기법의 우수성도 설명했다.

중국의 채륜이 종이를 발명했지만 한반도의 종이는 그 명성이 자자해 송나라 손목이 지은 ‘계림지’에는 “고려의 닥종이는 윤택이 나고 흰빛이 아름다워서 백추지라고 부른다”는 기록이 남을 정도였다. 제작 기법이나 원료 정제 등에서 원조를 뛰어넘은 응용기술을 보유했던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이 우리 역사의 선양에만 초점을 맞추지는 않았다. 을지문덕의 살수대첩에서 수나라 군사 대부분을 수장시킨 이야기에 대해서는 과장된 측면이 있다고 지적한다. 살수대첩의 대승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30만5000명의 수나라 군사를 수장시키기는 수나라 군대의 편제와 행진 방식 등을 꼼꼼히 따졌을 때 불가능하다고 설명한다.

이 밖에 자격루, 석굴암, 신라시대의 금관 등에 스며 있는 뛰어난 기술력도 빠뜨리지 않고 소개하며 저자는 선조들의 유산에서 과학성을 찾는 작업을 쉼 없이 이어 나가는 것이 후손들의 책무라고 강조한다.

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
5∼6 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황금보검(보물 제635호).저자는 “황금보검에 사용된 누금세공 기술과 나선무늬는 그리스·로마시대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며 신라의 문물교류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광범위하게 이뤄졌다고 설명한다. 사진 제공 동아시아
5∼6 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황금보검(보물 제635호).저자는 “황금보검에 사용된 누금세공 기술과 나선무늬는 그리스·로마시대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며 신라의 문물교류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광범위하게 이뤄졌다고 설명한다. 사진 제공 동아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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