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종말이 가까우면 컴퓨터 속 늑대가 세상을 구원하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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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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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늑대 파랑
윤이형 지음 332쪽·1만1000원·창비

윤이형 씨는 좀비, 사이보그, 컴퓨터 프로그램 등 이질적 타자들을 소설에 등장시킴으로써 사회체제가 지닌 문제를 환기한다. 사진 제공 창비
윤이형 씨는 좀비, 사이보그, 컴퓨터 프로그램 등 이질적 타자들을 소설에 등장시킴으로써 사회체제가 지닌 문제를 환기한다. 사진 제공 창비
더욱 튀고 더욱 깊어졌다. 윤이형 씨(35)의 두 번째 소설집 ‘큰 늑대 파랑’은 좀비, 사이보그, 컴퓨터 프로그램, 가상공간 등 다양한 장르서사로 가득하다. 꿈과 현실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이 상상력은 3년여 전의 첫 소설집 ‘셋을 위한 왈츠’보다도 발랄하다. 과연 이 작가는 “‘마법사와 전사와 사제와 도적’을 소설의 세계로 불러들이며 우주의 시공간을 가르는 거침없는 시간여행을 시도한다.”(평론가 백지연 씨)

흥미로운 점은 현실에 대한 고민이 깊어졌다는 것. 가령, ‘비평가와 작가 100명이 뽑은 가장 좋은 소설’(2007년)에 선정됐던 표제작 ‘큰 늑대 파랑’이 그렇다. 대학 동창인 사라, 정희, 재혁, 아영은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가상의 이미지 ‘파랑’을 만들어낸다. 늑대의 모습을 갖춘 파랑은 재앙이 닥치면 나타나 세상을 구원하도록 프로그래밍됐다. 도시에 좀비들이 나타나자 컴퓨터 밖으로 나온 파랑은 자신의 부모인 사라와 정희, 재혁을 구하려고 하지만, 그들은 이미 좀비가 돼버린 상태다. 마지막으로 어머니 아영을 만난 파랑은 아영을 옛 남자친구 K에게 데려다주기 위해 길을 떠난다. 기성 문법을 벗어난 이질적인 서사에 독자들이 곤혹스러워할 만한데, 여기에 현실의 무게감을 얹어놓는 작가의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우리가 뭘 잘못한 걸까? 그 사람들처럼 거리로 나가 싸워야 한 걸까? 그때 그러지 않아서 지금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난, 무언가를 진심으로 좋아하면 그걸로 세상을 바꿀 수 있을 줄 알았어. 재미있는 것들이 우리를 구원해줄 거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이게 뭐야? 창피하게 이게 뭐냐고? 이렇게 살다가 그냥 죽어버리는 거야? 정희의 말은 아영이 가끔 읽는 자기계발서 속 문장들보다도 앙상하고 힘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공허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재혁은 이주노동자들을 이용해 CF를 찍는 일을 하느라, 정희는 대중의 입맛에 맞는 글을 쓰느라 피곤하다. 재미있는 것들이 자신들을 구원해주리라 믿었지만 재미있다고, 진심으로 좋아한다고 여겼던 것들은 오히려 자신들을 갉아먹었다. 단지 소설 속 정희의 탄식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윤 씨 세대의 육성이기도 하다.


소설집에서는 소설쓰기에 대한 작가의 새로운 성찰을 발견할 수 있다. ‘로즈 가든 라이팅 머신’과 자전소설 ‘맘’에서 윤 씨는 창작이란 무엇인가를 묻는다. ‘로즈 가든 라이팅 머신’에서 간단한 문장만 쳐 넣으면 소설을 만들어주는 컴퓨터 프로그램을 등장시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이야기의 독창성에 대한 의지를 보여준다. ‘맘’은 딸 소현이 쓴 소설을 읽고 50년 뒤의 미래로 이동을 한 엄마의 이야기다. 미래에 종이로 된 책은 없어지지만 이야기 자체는 없어지지 않고 종이가 아닌 다른 형태로 보관되어 있다. 역시 ‘이야기의 불멸’에 대한 작가의 믿음을 확인할 수 있다.

평론가 백 씨는 “기술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사회에서도 가장 인간적이고 고유한 것의 핵심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믿음은 윤이형 소설이 보여주는 중요한 신념이지만, 그것이 장르서사의 실험 속에서 어떠한 방식으로 새롭게 추구될 수 있을지는 작가가 계속 고민해야 할 지점으로 다가온다”고 말했다. 이 묵직한 고민을 어떤 낯선 방식으로 표출해낼까. 작가의 다음 작품이 벌써부터 기대되는 이유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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