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공존을 향해/3부]<6>주거의 양극화가 계층의 양극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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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8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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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사세요?” 주소가 현대판 ‘계층 신분증’

《“아빠, 우리 강남으로 이사해요. 미팅에서 파트너가 ‘집이 어디냐’고 물어볼 때 ‘강남에 산다’고 해야 애프터 신청을 한다고요.”(대학생 딸) “우리 아빠가 사장이라고 하지?”(아빠) “물어보지도 않는데 그런 말을 어떻게 해요.”(딸)
삼성그룹 계열사의 ‘아주 잘나가는’ 사장이 몇 년 전 털어놓은 얘기다. 아빠는 딸의 얘기를 웃어넘기지 못하고 얼마 후 서울 강남구 대치동으로 이사했다. 소득에 따른 ‘주거 양극화’ 현상이 심화되고있다. 서울 강남처럼 부촌(富村)이 생기는 것은 큰 문제가 안 된다. 그러나 저소득층이 거주하는 일부 지역의 경우 치안 부재와 범죄 발생이 겹치면서 슬럼화 현상이 나타난다는 것은 예사 문제가 아니다.》

○ 주소는 ‘현대판 신분증’

수도권의 한 대학을 졸업하고 중소기업에 다니는 김모 씨(26·여)는 서울 강남의 33m²(10평) 남짓한 오피스텔에서 보증금 1000만 원, 월세 80만 원에 살고 있다. 80만 원이면 김 씨 월급의 절반 수준. 그는 “월세가 부담스럽지만 ‘강남 사람’이라는 자부심과 강남이 주는 문화적 혜택을 고려하면 아깝지 않다”고 말했다.

김 씨처럼 주거지를 소속 계층의 상징으로 여기는 이들이 적지 않다. 어느 지역, 어떤 도시에서 사는지에 따라 삶의 정체성이 차별화된다고 느끼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대학생층으로도 내려간다. 한 대학생의 얘기를 들어보자.

“요즘 대학에서는 동아리 활동이 제대로 안 돼요. 그 대신 배경이 비슷한 친구끼리 어울리죠. 강남 출신은 그들끼리, 지방 출신도 그들끼리…. 사는 곳에 따라 패션 브랜드에 대한 취향부터 해외거주 경험, 라이프스타일까지 차이가 나면서 ‘끼리끼리’ 문화가 자연스레 형성됩니다. 강남의 카페에서 모임을 갖는데 엉뚱한 친구가 참석할 경우 분위기가 어색해져요. 딱히 배척하는 것은 아니지만…그냥 불편해요.”

고려대 김문조 교수(사회학)는 “‘강남 문화는 세련되고 강북 문화는 촌스럽다’는 식의 인식이 등장하면서 소비취향, 사고방식에도 차이가 생겼다”며 “거주지 양극화가 사회문화적 양극화로 진행되는 단계에 들어섰다”고 분석했다.

학교 가는 길… 부수다 만 공사판 vs 비상벨 44개-CCTV 1130개 소득에 따른 ‘주거 양극화’로 저소득층 거주지가 슬럼화하면서 치안 양극화 현상도 뚜렷이 나타난다. 뉴타운 예정 지역(윗 사진)인 서울 마포구 아현동 일대의 방치된 철거대상 주택 사이로 아이들이 하교하고 있다. 반면 올해 6월 입주가 이뤄진 경기 용인시의 한 아파트(아래 사진)에는 단지 안에 있는 학교까지 가는 통학로에 44개의 비상벨과 1130개의 폐쇄회로(CC)TV가 설치돼 있어 무척 대조적이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학교 가는 길… 부수다 만 공사판 vs 비상벨 44개-CCTV 1130개 소득에 따른 ‘주거 양극화’로 저소득층 거주지가 슬럼화하면서 치안 양극화 현상도 뚜렷이 나타난다. 뉴타운 예정 지역(윗 사진)인 서울 마포구 아현동 일대의 방치된 철거대상 주택 사이로 아이들이 하교하고 있다. 반면 올해 6월 입주가 이뤄진 경기 용인시의 한 아파트(아래 사진)에는 단지 안에 있는 학교까지 가는 통학로에 44개의 비상벨과 1130개의 폐쇄회로(CC)TV가 설치돼 있어 무척 대조적이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서울 관악구가 지역 이미지 쇄신을 위해 2008년 신림4동을 신사동, 신림6·10동을 삼성동으로 변경한 일이나, 양천구 신월·신정동을 ‘신목동’으로 바꾸려다 목동 주민들의 반발로 무산된 일 등은 이미 ‘사는 동네’가 계급 지표가 됐음을 반영한다.

○ 아이 안전도 돈이 있어야

25일 오후 서울 마포구 아현동의 뉴타운 예정지역. 고층 빌딩 뒤편으로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빈집 내부에는 소주와 막걸리 병, 담배꽁초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골목 하나를 사이에 두고 뉴타운 지정에서 제외된 지역도 을씨년스럽기는 마찬가지. 차 한 대도 지나가기 힘든 골목 사이로 창문도 없는 소규모 봉제 공장들만이 늘어서 있었다. 35년째 산다는 한 노인(63)은 “중고교생들이 빈집을 찾아다니며 몰래 들어가 술 마시고 노는 일이 잦아 무슨 일이 생길까봐 걱정”이라며 한숨을 쉬었다.

같은 날 경기 용인시 수지구의 R아파트. 고가의 분양가로 논란이 됐던 아파트로 6월부터 입주가 시작된 곳이다. 48개 동 2393채로 구성된 아파트 단지에는 초등학교와 중학교가 들어서 있다. 아파트 입구에서 학교까지 가는 통학로에는 모두 44개의 비상벨과 1130개의 폐쇄회로(CC)TV가 설치돼 있다. 아파트 외곽에도 영상감지 시스템이 설치돼 있어 인적이 드문 곳에 사람이나 물체가 나타나면 동영상이 보안센터로 자동 전송된다.

입주민인 장모 씨(38)는 “최근 치안이 불안한 곳에서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성폭력 범죄가 많이 발생해 불안했는데, 이 아파트로 이사 온 뒤에는 그런 걱정을 많이 덜었다”고 말했다.

○ 주거양극화가 계층 재생산으로

주거양극화는 외환위기를 계기로 가속화됐다. 당시 정부는 침체된 주택시장을 부양하기 위해 분양가 규제와 전매제한 폐지, 소형주택의무 건설비율 완화 등의 정책을 폈다. 이로 인해 2000년대 초반부터 가구 소득에 비해 주택가격이 가파르게 상승했다. 재개발 재건축 바람으로 ‘저렴한 서민주택’이 급격히 사라진 것도 주거양극화를 가속시킨 주요 요인이다.

‘버블 7’ 지역 집값이 급등하면서 경제 불평등도 심화됐지만 성실한 노동의 가치가 훼손되면서 근로의욕을 떨어뜨리는 부작용도 생겼다. 봉급을 모아 자산소득을 따라잡을 수 없다면 부동산 투기에 나서는 방법밖에 없기 때문. 이런 태도는 냉소적 사회관을 야기하며 통합을 저해하고 정부를 불신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주거지 분리는 자연스럽게 교육 양극화로 이어진다. 계층 재생산의 연결고리가 되고 있는 것이다. 특별취재팀이 통계청의 2005년 인구주택총조사 자료를 분석한 결과도 ‘주거 격차→교육 격차→직업 격차→소득 격차’의 가설과 일치했다.

서울 서초구, 강남구의 20∼24세의 대학진학률은 각각 68.1%와 64.3%로 중랑구(37.8%) 강북구(37.2%)의 2배에 이르렀다. 또 부모 세대인 50∼54세의 대졸자 비율도 서초구, 강남구가 40.9%와 42.2%로 금천구(8.9%) 중랑구(8.6%) 강북구(8.8%)의 5배에 달했다. 전문 관리직 종사자 비율은 서초구, 강남구가 각각 22.7%와 21.9%로 금천구(10.3%) 중랑구(10.3%)의 2배 이상이었다.

지방 대 서울, 수도권 대 비수도권, 서울 강남권 대 비강남권 식의 지역별, 주거지별 구별 짓기는 당연히 사회통합의 장애물이다. 때로는 특정지역 주민들을 적(敵)으로 모는 분위기가 형성되기도 한다. 이 때문에 부자감세 논란이나 최근의 부동산활성화 등 정부와 정치권이 내놓는 정책의 상당수가 ‘부자-서민’ 프레임에 갇히면서 올바른 토론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

○ 저소득 주거지의 삶의 질 높여야

어느 국가나 ‘부촌’과 ‘서민동네’는 존재한다. 전문가들은 주거 양극화의 문제는 선진국으로 진입하는 단계에서 겪을 수밖에 없는 현상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2003년부터 10년간 국민임대주택 100만 채를 짓겠다’는 식으로 단순히 주택보급량을 늘리는 것으론 해결할 수 없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한국의 주택보급률은 이미 100%에 근접했기 때문.

수요에 맞는 주택이 보급돼야 한다. 한국토지주택공사 토지주택연구원의 진미윤 수석연구원은 “도시 저소득층이 실제로 거주할 수 있는 주택공급이 이뤄지기 위해선 무엇보다 이들의 소득수준 파악이 필요하다. 그 뒤에 수요와 구매 능력에 맞는 다양한 유형의 주택공급이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저소득층 지역에서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 정책 개발이 동반돼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예를 들어 재개발 지역은 계획 단계부터 치안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빈집 출입을 막는 등 구체적인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다세대주택 단지의 경우 주민들이 둘러앉아 쉬면서 마을을 살필 수 있는 소규모 공공시설을 만들면 범죄 예방에 효과를 볼 수도 있다.

재개발을 할 때 저소득층 거주 주택을 한꺼번에 철거하기보다는 순차적으로 개발하는 방식 등도 대안으로 제시된다.

송시형 박사(사회학)는 “의식주는 생존의 기본적 조건이지만, 특히 주거는 다른 요소들과 달리 계층세습의 고리가 된다. 이 문제를 자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계층에 대해선 국가가 일정 부분 나서야 한다는 사회적 공감대를 기초로 장기적으로 주거 인프라를 확충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세진 기자 mint4a@donga.com

김철중 기자 tnf@donga.com

▼ 재개발만으로 주거 양극화 해결 안되는 까닭은 ▼
상가 권리금 날려도 보상 없고 돈없는 원주민 입주 엄두 못내

서울 종로구 공평동에서 99m²(30평) 규모의 상가를 임차해 노래방을 운영하던 이모 씨(55)는 5월 도심환경정비사업으로 문을 닫아야 했다. 이 씨가 이전 세입자에게 지불한 권리금은 1억5000여만 원. 하지만 조합은 재개발(보통 4개월 영업보상비를 지급)과는 달리 재건축사업은 권리금을 보상할 필요가 없다는 관련법을 내세우며 영업보상비를 주지 않았다. 이 씨는 “다른 세입자들과 함께 서울시청 앞에서 시위하는 것 외에는 아무 대책이 없다”고 말했다.

지난해 초 발생한 용산참사 때도 핵심 갈등요인은 권리금이었다. 임대보증금의 몇 배에 이르는 거액의 권리금을 임차상인끼리 임의로 주고받는 것은 한국에서만 존재하는 독특한 거래관행이다. 그러나 재개발 등이 추진될 때 아무도 권리금에 대해 책임져주지 않는다. 전형적인 ‘폭탄 돌리기’ 게임으로 임차인들은 자신이 마지막 폭발을 맞지 않기만 바랄 뿐이다. 이 때문에 권리금에 대한 중앙정부 차원의 근본대책이 필요하지만 국토해양부는 용산참사 이후 1년 반이 지나도록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서울시의 뉴타운 계획 활성화로 본격적으로 시작된 도심 재개발 재건축 바람은 세입자와 영세상인들을 거리로 내몰았다. 그나마 세입자를 위해서는 이주보상비나 임대주택 입주권을 주는 등 2007년 관련법이 마련됐다. 서울시도 지난달 재개발·재건축 공공관리제를 도입하는 등 진전이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제대로 된 보상이 이뤄지는 경우는 드물다. 전국철거민협의회 강연화 조직국장은 “무주택 세입자의 경우 임대주택 입주권과 주거이전비를 모두 보상받을 수 있지만, 둘 다 지원해주는 조합은 거의 없다”고 말했다.

재개발 재건축의 경우 ‘수익사업’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원주민 주거환경 개선’이란 시각에서 접근하는 인식전환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많다. 현행 시스템에서는 재개발이 이뤄져도 수억 원의 공사비 부담 때문에 형편이 안 되는 사람들은 보상을 받고 떠난다. 이들은 주거환경이 더 열악한 곳으로 밀려난다. 지난해 서울 등 수도권 내 재개발사업과 관련한 원주민 재정착률은 평균 34%. 2008년 입주를 시작한 은평뉴타운은 15∼20% 수준이다.

김철중 기자 tnf@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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