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뮤직]신여성 소프라노, 조선 음악산업의 서막을 열다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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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8월 26일 14시 5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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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헌의 대중음악산책]
"삶에 열중한 가련한 인생아 너희는 칼 위에 춤추는 자로다…"

● 한국 대중음악의 뿌리를 찾다 보면 당도하게 되는 '윤심덕'
● 유성기 보급에 혁혁한 공을 세운 1926년작 '사의 찬미'


1990년 김호선 감독에 의해 만들어진 장미희 주연의 사의찬미
1990년 김호선 감독에 의해 만들어진 장미희 주연의 사의찬미

올해는 일제의 강제병합 100년이 되는 해다. 1990년 아키히토 일왕의 그 유명한 수사, "통석(痛惜)의 염(念)을 금할 수 없다"가 나온 이후, 나오토 일본 총리의 "한국인의 뜻에 반한 식민지배"에 대한 반성과 사죄가 나오기까지 무려 이십년이 걸렸다.

그러나 100년이 되도록 일본은 공식적으로 강제 병합의 불법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각료 전원이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 식민지배 100년을 맞이한 일본 정부의 유일한 제스처이다. 그런데 8월은 우리 현대사의 운명을 가로지른 달이지만 동시에 한반도의 대중문화사에서도 중요한 전환점을 이룬 달이기도 하다.

박채선과 이류색 이 두 기생에 의해 녹음된 '이 풍진 세월'이 한국 대중음악사의 여명이라면 1926년 소프라노 윤심덕에 의해 녹음된 '사(死)의 찬미'는 본격적인 음반 산업의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비극적인 팡파레였다.

이 노래와 이 노래의 주인공이 비극적인 것은 이미 주지의 사실이다. 윤심덕 스토리는 두 번이나 영화로 만들어졌고 뮤지컬로도 만들어졌다. 이 세 편의 여주인공이 모두 당대 최고의 여배우였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우리나라 첫 여류 성악가 윤심덕 씨. 한국 첫 여류 음악 전공자이자 레코드 취입자로 사진은 히트송 ‘사의 찬미’를 취입했을 때의 모습이다. 1926년 8월. 동아일보 자료 사진
우리나라 첫 여류 성악가 윤심덕 씨. 한국 첫 여류 음악 전공자이자 레코드 취입자로 사진은 히트송 ‘사의 찬미’를 취입했을 때의 모습이다. 1926년 8월. 동아일보 자료 사진


■ 한국 대중문화의 영원한 고전 1920년대의 윤심덕

첫 번째로 영화화한 1969년 안현철 감독의 '사의 찬미'의 히로인은 문희였고, 1990년 김호선 감독 작품의 주인공은 장미희였다. 뮤지컬 '사의 찬미'의 타이틀 롤 또한 한국 뮤지컬 사상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던 윤석화가 맡았을 정도이다. 도대체 저 1920년대의 윤심덕에게 무슨 그리 깊은 곡절이 있기에 이토록 잊을 만하면 새롭게 리메이크되는 것인가?

윤심덕과 '사의 찬미'라는 노래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요즘 젊은이들도 윤심덕이 극작가 김우진과 현해탄에 몸을 던져 동반 자살했다는 얘기는 어찌어찌 귀동냥으로 들어 안다. 이 비극적인 드라마의 매혹의 핵심은 동반 자살, 그것도 유부남과의 불륜의, 참으로 낭만적이게도 현해탄 밤바다의 관부연락선 상에서의 투신자살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20세기 대중문화계엔 수많은 죽음의 스캔들이 있었다. 커트 코베인이나 마릴린 먼로의 경우처럼 스타의 자살과 의문사는 대중들에게 가장 강렬한 충격을 선사한다. 죽음의 센세이셔널리즘만을 따진다면 윤심덕과 김우진의 동반 자살은 아마도 20세기 전 세계 스캔들의 엄지손가락에 걸릴 만한 사건일 것이다.

이들 이후로도 많은 스타들이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했지만 그 드라마틱한 정도에 있어서 이들 커플에 비견될 만한 경우는 찾아보기 어렵다. 정말이지 아이러니한 사실이지만 윤심덕과 그의 연인의 죽음으로 인해서 식민지 조선의 대중음악사가 본격적으로 열린다.
1930년대 경성에서 유행하던 일제 축음기. 당시 앨범 한 장이 지금가치로 수십만원을 호가했다.
1930년대 경성에서 유행하던 일제 축음기. 당시 앨범 한 장이 지금가치로 수십만원을 호가했다.

1926년 8월5일 '동아일보'가 이 불행한 연인들의 충격적인 정사(情死)를 보도하면서 이 사건은 한반도의 인구에 회자하게 되었고, 죽음 직전에 일본 오사카의 이토오(日東)레코드 회사에서 윤심덕이 녹음한 '사(死)의 찬미'의 음반이 출시되자마자 한반도 전역에서 유성기 신드롬이 일게 된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죽음은 자본주의 사회의 대중을 열광시키는 가장 효율 높은 미약(媚藥)이다. 대량 생산과 대량 복제의 본질을 지니는 자본주의는 생명마저도 복제하려 들지만 그러나 죽음만큼은 복제하지 못한다. 자본주의 시대에 죽음은 결코 복제되지 않는 마지막 진본인 것이다.

하지만 윤심덕과 김우진이라는 식민지의 두 지식인의 죽음이 무엇인가를 분만하지 않았더라면 이들 죽음에 대한 열광은 무성한 가십에 소진되고 말았을 것이다. 이들의 사후에 발매된 '사의 찬미'는 이들 죽음의 기록이자 신화의 증거가 되었다.

극작가로서 한국 근대 연극의 문을 연 인물인 김우진이 예술사적인 측면에서는 윤심덕보다 훨씬 비중 있는 존재일지는 모르겠지만, 대중의 무의식적 무대에선 스포트라이트가 윤심덕에 쏠린 것도 바로 이 노래 때문이었다.
윤심덕의 연인 김우진. 한국 근대희곡자 작가 중 하나라 `산돼지` '李英女(이영녀)', '正午(정오)' 등의 작품을 남겼다.
윤심덕의 연인 김우진. 한국 근대희곡자 작가 중 하나라 `산돼지` '李英女(이영녀)', '正午(정오)' 등의 작품을 남겼다.

■ 지금 가격으로 한 장에 40만원 하던 앨범 보급의 주역

식민지 시대에 보기 드문 일본 유학파 두 남녀가 자살했다. 그리고 곧이어 죽은 여성의 유작음반이 발표되었는데 그것은 "죽음을 찬미한다"는 제목을 갖고 있는 지극히 페시미즘적인 노래였다. 마치 죽음을 예감하고 부른 것처럼…. 이보다 더 이상 완벽할 수 있겠는가?

당시의 식민지 대중이 이 매혹적인 죽음의 주술에 걸리는 그 순간이야말로 한국의 대중음악사가 본격적으로 고고성을 터트리는 시점이 될 것이다. 1921~1922년경 '이 풍진 세월' 훨씬 이전부터 이 땅의 음악은 녹음되기 시작했다.

기록에 의하면 1895년 주한미국 영사 알렌의 주선으로 판소리 명창 박춘재 등이 시카고에서 열린 만국 박람회에 참가하여 미국의 빅터 레코드 회사 주선으로 녹음했다는 설이 있고, 1899년 황성신문에도 레코드 감상회가 열린다는 광고가 실렸을 정도이다. 그리고 1908년에 이르면 명창 이동백을 위시한 전통음악인들의 소리가 빅터 회사에서 녹음되어 출판되었다는 신문 기사가 전한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기록적인 성격이 우세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낙후한 식민지 경제 상황에서 눈이 튀어나올 만한 가격표가 붙은 음반이 대중적인 상품이 되기에는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1920년대 중반 음반 한 장 가격은 2원 내외였던 걸로 보인다. 당시 경성의 다방의 찻값이 5전이었으니 굳이 지금의 시세로 따진다면 음반 한 장 가격이 대략 40만원 정도가 된다. 소프트웨어 값이 이 정도면 하드웨어인 유성기 가격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일 터. 보통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수준의 문화가 아닌 셈이다.

하지만 동반자살이라는 비극적 드라마의 위대함은 이와 같은 현실적 장벽을 가볍게 뛰어 넘는다. 구체적인 판매수치는 집계되지 않았지만 '사의 찬미' 이전 한반도 전체에 보급된 유성기는 고작 2000대 내외였다.

하지만 이 단 한곡의 노래로 깡촌 구석구석까지 유성기와 레코드는 순식간에 파고 들어간다. 1926년 당시 열 살이었던 한국 예술계의 원로 박용구의 회고담에 의하면 오지 중의 오지랄 수 있는 경북 풍기 내륙까지 '사의 찬미'의 사운드가 울려 퍼졌다고 한다.

(②편에 이어집니다.)

강헌 / 음악평론가
강헌 / 음악평론가
강헌 / 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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