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칼럼/박은경]밴쿠버 방송센터에서 보낸 한 달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3월 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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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 드디어 끝났구나. 밴쿠버 겨울올림픽의 성화가 꺼지자 안도감이 밀려왔다. 긴장이 한꺼번에 풀어지는 느낌이랄까. 막상 밴쿠버를 떠나려니 고통스러운 경험조차도 아련한 추억으로 느껴진다.

밴쿠버의 겨울은 하루 종일 비가 내릴 때가 많다. 겨울올림픽 기간에 1주일 정도는 구름 한 점 없는 쾌청한 날씨를 만날 수 있었다. 행운이었다. 하지만 나에게 파란 하늘 감상은 사치에 불과했다. 하루 종일 스튜디오에 있으면 밖에 비가 오는지, 바람이 부는지, 햇빛이 비치는지 알 길이 없다. 동료들은 스튜디오를 어항이라고 불렀다. 견학 온 사람들이 조그만 창에 얼굴을 대고 방송을 지켜볼 때면 정말 어항 속 금붕어가 된 것 같다.

캐나다로 떠나기 전 선배들은 “여름올림픽에 비하면 겨울올림픽은 식은 죽 먹기”라고 했다. 종목 수도 적은 데다 한국 선수의 출전 종목만 집중하면 되니 일하는 시간이 길지 않기 때문이다. 밴쿠버 겨울올림픽은 이전 올림픽과는 180도 달랐다. 단독 중계였기에 한국 선수의 경기뿐만 아니라 모든 종목을 중계해야 했고 방송 시간도 예년과 비교해 2, 3배 늘었다. 국제방송센터는 왜 그리도 추운지…. 기계의 열을 식히기 위해 온도를 낮추다 보니 옷을 몇 겹 껴입어도 으슬으슬 떨린다. 밴쿠버는 114년 만에 이상고온으로 따뜻했지만 국제방송센터는 뼛속까지 시렸다.

아침에 출근해 스튜디오로 들어가면 방송이 끝날 때까지 9∼10시간을 꼼짝 못한다. 언제 스튜디오로 컷이 넘어올지 몰라 자리를 비울 수가 없다. 귀에 이어폰을 꽂고 옷깃에 마이크를 달면 마음껏 움직일 수도 없다. 움직일 수 있는 반경은 1m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밥도 중간에 스태프가 넣어준다. 감옥이 따로 없다.

긴장 속 하루 10시간 강행군에 속병

갑자기 방송사고가 나면 곧바로 스튜디오로 화면이 넘어오므로 하루 종일 긴장해야 한다. 선수의 경기도 놓쳐서는 안 된다. 밝은 조명 앞에서 하루 종일 모니터를 뚫어져라 보는 바람에 퇴근할 때면 눈이 흐릿해진다. 허리를 세우고 앉아 있다 보니 꼬리뼈도 아프다. 숙소로 돌아와 시계를 보면 오후 11시, 12시다.

강행군을 하다 보니 하나둘 건강에 이상신호가 온다. 바깥 날씨를 모른 채 하루 종일 추운 냉장고 속에서 기계와 함께 씨름하니 그럴 만도 하다. 먼저 주위 동료의 얼굴색이 누렇게 변한다. 감기에 걸리고 배탈이 난 사람이 생겨나고 발이 아픈 사람, 허리가 아픈 사람도 나온다. 나도 소화불량으로 고생했다.

몸이 아프면 자연히 마음도 예민해지는 법. 좁은 공간에서 많은 사람이 하루 종일 부대끼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험한 말이 나오고 때론 상대방에게 상처를 준다. 나 역시 몸과 마음이 지친 상태에서 상대방의 말에 상처를 받아 국제방송센터 구석에서 눈물을 흘린 적도 있다. 다행히 몇몇 캐나다인을 빼고 아무도 본 사람은 없다. 그런데 캐나다인들은 참 오지랖이 넓다. 다 큰 여자가 울고 있으니 그냥 지나치질 않는다. 과일을 가져다주기도 하고, 물을 주기도 하고, 다들 날 재미있게 해주려 참 애를 썼다.

그러고 보니 밴쿠버에서 여러 번 눈물을 흘렸다. 밴쿠버행 비행기에 오르기 한 달 전 “다섯 번째 올림픽에선 꼭 금메달을 따내겠다”던 이규혁 선수를 만났다. 몸무게를 6∼7kg 줄일 만큼 정말 열심히 준비했다. 부릅뜬 눈에선 자신감도 읽혔다. 밴쿠버 아이스링크에서도 그는 죽을힘을 다해 달렸다. 하지만 메달과 인연이 없었다. 얼음 위에 누워 있는 그의 모습을 보자 가슴이 아팠다.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날 이규혁 선수가 방송센터에 왔다. SBS는 그의 메달 획득을 고대하며 실물 사이즈의 입상(立像) 이미지판을 만들어 놓았다. 환하게 웃는 자신의 모습을 보더니 갑자기 그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나도 가슴이 찡해지고 코끝이 시렸다. “정말 잘했다”고 말하며 등을 두드려줬다.

선수들이 건넨 감동은 만병통치약

김연아 선수는 작년 12월 초 일본에서 열린 그랑프리 파이널 우승 때 인터뷰를 했다. 당시 그녀가 느낀 올림픽 금메달에 대한 부담감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컸다. 안쓰러웠다. 겉으로 표현 안 하려 애썼지만 나는 느낄 수 있었다. 가슴이 아려왔다. 그녀의 경기 전날 나는 한숨도 자지 못했다. 아침부터 말조심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경기가 시작되자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그녀가 모든 연기를 완벽하게 마쳤을 때 나도 모르게 환호성을 질렀다. 그리고 그녀의 눈물을 봤다. 어린 나이에 얼마나 부담이 컸을까…. 나도 하염없이 울었다.

스트레스를 받고 몸과 마음이 피곤해져도 한국 선수의 메달 소식은 만병통치약이었다. 메달을 따지 못하더라도 열심히 땀 흘리며 뛰는 대한민국 국가대표 선수를 보면 피곤이 싹 달아났다. 밥을 안 먹어도 배가 부를 정도였다. 그들이 있었기에 어항 속 한 달을 무사히 넘길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아차, 3월에 첫돌을 맞이하는 딸의 선물을 못 샀다. 아리야, 미안해. 하지만 엄마는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단다. 이해해 줄 거지?

박은경 SBS 아나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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