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 인공호흡기 단 나약한 삶, 더 숨쉬려는 처절한 몸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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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3월 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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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람이 분다, 가라/한강 지음/390쪽·1만 원·문학과지성사

소설 속에서 외삼촌 이동주가 그린 그림의 모티브가 된 화가 한은선 씨의 ‘물결치다’(2003년). 사진 제공 문학과지성사
소설 속에서 외삼촌 이동주가 그린 그림의 모티브가 된 화가 한은선 씨의 ‘물결치다’(2003년). 사진 제공 문학과지성사
겨울 어느 날, 정희는 한 대형서점에서 화가였던 친구 인주의 추모특집이 실린 미술 월간지를 발견한다. 1년 전 눈 오는 설악산 미시령에서 일어난 교통사고. 그 죽음을 자살로 결론지은 글에 동의할 수 없었던 정희는 그 글을 쓴 미술평론가 강석원을 만난다.

정희는 강석원에게 인주의 유작이 실은 인주의 외삼촌 이동주의 그림을 따라 그린 것이라는 사실을 밝히며 인주의 평전 출간을 미룰 것을 종용한다. 하지만 인주를 사랑한 나머지 집착했던 강석원은 자신의 뜻대로 인주를 ‘자살한 비운의 천재 화가’로 만들기 위해 오히려 정희를 협박한다. 결국 정희는 자신이 기억하는 인주의 모습을 담은 또 다른 평전을 쓰기로 결심한다.

표면적으로는 친구의 죽음 너머에 있는 진실을 추적해나가는 한 여자의 이야기다. 그 이면에는 과거에 사로잡힌 채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흔들리는 사람들의 모습을 나직하면서도 힘 있게 담아냈다.

정희와 인주는 중고교 시절부터 친구였다. 둘은 한 사람의 죽음을 공유한다. 병약했던 인주의 외삼촌 이동주다. 그는 먹을 입힌 한지에 물을 번지게 하는 독특한 기법으로 별의 탄생과 소멸을 연상시키는 그림을 그리는 이름 없는 화가였다. 갑작스러운 이동주의 죽음은 정희와 인주의 삶을 뒤흔든다. 인주는 부상으로 육상을 그만둔 뒤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정희는 외삼촌을 닮은 남자와 불행한 결혼생활을 하다 자살을 시도한다.

하지만 정희는 인주의 죽음을 둘러싼 의문을 풀어가며 자신이 알고 있던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정희가 인주를 알기 한참 전부터 이미 인주의 삶을 사로잡고 있던 과거의 뿌리가 있었던 것. 그 모든 것이 시작된 곳이 바로 인주가 죽은 설악산 미시령이다.

소설의 모티브가 된 ‘브레스 파이팅(breath fighting)’은 인공호흡기를 낀 환자가 갑자기 스스로 숨을 쉬면서 벌어지는 충돌을 뜻한다. 호흡기의 들숨에 환자는 날숨을 쉬고, 호흡기의 날숨에 환자가 들숨을 쉬기 때문에 자칫하면 생명을 앗아갈 수 있다. 하지만 살고자 하는 환자의 의지를 보여주는 역설적인 상황이기도 하다. 소설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가 팽팽하게 날을 세운 공간으로 그려지는 눈 덮인 미시령은 등장인물들의 브레스 파이팅이 일어나는 공간이기도 하다.

소설은 과거에 붙잡혀 나약하기만 한 인간의 모습에서 멈추지 않고, 그럼에도 또다시 살아가려 투쟁하는 모습으로 한 단계 더 나아간다. 작가가 말하는 삶의 의지는 인주의 그림들이 별이 폭발하듯 불타는 마지막 장면, 정희가 죽음의 고비를 넘기는 그곳에서 가장 생생하게 살아난다.

“누군가가 부풀어 오른 팔로 물속에서 파란 돌을 건져 올린다. 누군가가 무릎이 짓이겨진 채 뜨거운 배로 바닥을 밀고 간다.”

이새샘 기자 iams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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