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한 국민 마라토너 이봉주, 인생2막 출발선…봉달이가 다시 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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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9년 11월 4일 07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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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상한 나뭇가지를 휘젓는 초겨울의 싸늘한 바람. 켜켜이 흩어지는 이봉주의 머리카락 사이에서 세월의 무게를 느낄 수 있었다. 20년 넘게 고독한 레이스를 펼친 이봉주가 새로운 출발을 위해 신발끈을 동여맸다. 화성 |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앙상한 나뭇가지를 휘젓는 초겨울의 싸늘한 바람. 켜켜이 흩어지는 이봉주의 머리카락 사이에서 세월의 무게를 느낄 수 있었다. 20년 넘게 고독한 레이스를 펼친 이봉주가 새로운 출발을 위해 신발끈을 동여맸다. 화성 |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42.195km를 참아온 엉덩이 통증. 후배들에게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기 싫어, 이를 물고 달려온 길이었다. 10월21일 대전에서 열린 제90회 전국체육대회 남자마라톤. ‘국민마라토너’ 이봉주(39·삼성전자)는 41번째 풀코스 완주에서 2시간15분25초로 1위를 차지했다. 기쁨도 잠시. 곧장 화장실로 달려갔다. 소변에는 핏기가 돌았다. 정상이 아닌 몸을 끌고 가다보니 신장에 무리가 왔다. 이미 훈련 때부터 아려왔던 엉덩이. 경기 4일전에는 정상적인 경기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자기 스스로도 뭉클한 최후의 레이스.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는 은근과 끈기의 대명사였다.‘족패천하(足覇天下·발로 천하를 제패하다).’ 1947년 서윤복이 보스턴마라톤에서 우승했을 때 ‘백범’ 김구가 내린 휘호가 누구보다 잘 어울리는 마라토너. 2일, 경기도 화성 삼성전자 육상단에서 새로운 출발선에 선 이봉주를 만났다.》

○가슴에 꿈을 품고 달렸던 아이

‘러너는 가슴 가득 꿈을 안고 달려야 한다. 호주머니 가득 돈을 채운 자는 진정한 러너가 아니다.’ -에밀 자토펙(체코의 마라톤 영웅, 1952헬싱키올림픽금메달리스트)

가난한 농부의 아들. 이봉주(39·삼성전자)의 사진첩에는 그 흔한 돌 사진 한 장 없다. “옛날 시골 살림살이가 뻔하니까…. 사진 한 장 제대로 찍을 형편도 못됐어요.” 그래도 그에게는 꿈이 있었다. 달리는 것이 마냥 좋았던 아이. 복싱도 해 보고 태권도장도 기웃거려봤지만, 사내아이들 틈바구니에서 어깨에 힘 좀 주는 것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이 있었다. 천안농고 1학년 시절, 운명처럼 두드린 육상부의 문.

하지만 처음부터 시련의 연속이었다. 고등학교 1학년을 2번 다니는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육상명문 삽교고등학교로 재입학했지만 청천벽력이 날아들었다. 역전마라톤 대회에서 1등을 하지 못하면 육상부를 해체한다는 통보. “아슬아슬하게 2위였어요. 모두가 허망하게 하늘만 바라봤죠. 자존심 때문에 티는 내지 않았지만 마음속으로는 울고 있었어요.”

멀쩡한 자식이 떠돌이 학생 신세가 된 것을 반길 부모는 없었다. 한 번도 부모 속을 썩인 적 없던 착한 아들은 그 때 처음으로 ‘반항’을 해봤다. 다시 광천고등학교로 적을 옮기며 순한 양의 가슴에 불씨가 심어졌다. “그래서 더 포기할 수가 없었어요. 그 때 처음 독기를 품었습니다.”

○대박 운은 없었지만, 난 행운아

고등학교 졸업직전까지 변변한 메달 한 개가 없어 진로조차 불투명했던 상황. 고등학교 3학년 마지막 대회에서 입상한 이봉주는 기적처럼 서울시청에 입단한다. 이 때부터 하루 30∼40km의 강 훈련을 소화했다. 이봉주는 “20년간 1년 365일 가운데, 며칠을 빼고는 매일 똑 같은 거리를 달렸다”고 했다. 단순 계산만으로도 20∼30만km를 달린 셈.

마침내 이봉주에게도 기회가 찾아왔다. 1993호놀룰루 국제마라톤. 아프리카 선수 사이를 비집고 나간 이봉주는 하와이 교민들의 열렬한 응원 속에 1위를 차지했다. 국제대회 첫 우승. “마라톤은 내가 진다고 생각하는 순간, 집니다. 이 때부터 세계적인 선수들을 만나도 주눅 들지 않게 됐지요.”

1996애틀랜타올림픽은 이봉주가 가장 아쉬운 레이스로 꼽는 경기다. 막판 스퍼트로 거리를 좁혔지만, 결국 조슈아 투과니(남아공)에게 3초차 뒤진 은메달. 이봉주는 “그 때 100m만 더 달렸더라면…”이라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4년간 칼을 갈았지만 2000아테네올림픽에서는 다른 선수와 부딪히는 불운을 겪었다. 최상의 컨디션이었기에 아쉬움은 더 컸다. 2004시드니올림픽 직전에는 불의의 부상까지.

이봉주는 “난 대박운은 없었던 모양”이라면서도 “나는 행운아”라고 했다. 올림픽에서 좌절했기에 20년간 계속 꿈을 갖고 달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앙상한 나뭇가지를 휘젓는 초겨울의 싸늘한 바람. 켜켜이 흩어지는 이봉주의 머리카락 사이에서 세월의 무게를 느낄 수 있었다. 20년 넘게 고독한 레이스를 펼친 이봉주가 새로운 출발을 위해 신발끈을 동여맸다. 화성 |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앙상한 나뭇가지를 휘젓는 초겨울의 싸늘한 바람. 켜켜이 흩어지는 이봉주의 머리카락 사이에서 세월의 무게를 느낄 수 있었다. 20년 넘게 고독한 레이스를 펼친 이봉주가 새로운 출발을 위해 신발끈을 동여맸다. 화성 |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인생은 마라톤, 진정한 마라토너는 겸손의 길을 달린다

극한을 딛고 선 인간. 이봉주는 마라톤 정신을 가장 잘 구현한 선수로 꼽힌다. 부진의 늪을 걸어 모두가 끝났다고 생각한 순간, 다시 정상의 기록으로 돌아온 것이 그의 마라톤 인생이었다.
애틀랜타올림픽 이후 첫 대회였던 1996후쿠오카 마라톤. 트랙에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상황은 올림픽 때와 같았다. 근소한 차이의 2위. ‘2번 실패는 하고 싶지 않다’고 별렀던 대회. 순간, 알 수 없는 힘이 나왔다. 이봉주는 “정신을 놓지 않으면 지지 않는다는 것, 그것이 인생이라는 것을 배웠다”고 했다.

2007동아국제마라톤도 길이 남을 명승부였다. 당시 우리 나이로 서른일곱. ‘예상대로’ 35km지점에서 이봉주가 처졌다. 하지만 5km에서 숨을 고른 이봉주는 40km 지점에서 다시 치고 나갔다. 결국 케냐선수를 따돌리고 우승(2시간8분4초). 경제위기속에서 풀이 죽어있던 중년 가장들에게 희망을 준 레이스였다.

“그 경기에서 사실 가장 큰 감동을 받은 사람은 저 자신이에요. 나이 먹어서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 그 덕에 2년간 선수를 더할 수 있었고, 새 출발에도 두려움은 없습니다.”

2001보스턴마라톤을 비롯해 무수한 국제대회를 휩쓴 이봉주이지만, 그는 아직도 20세 신인선수처럼 먼저 고개를 숙인다. ‘겸손’은 마라톤이 그에게 물려준 유산. 자신을 철저히 불태워 지워 없애 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덕목이다. 그래서 이봉주의 은사 오인환(50·삼성전자) 감독은 “스타였지만, (이)봉주는 무엇을 해도 잘 해낼 것”이라고 했다.

앞만 보고 달려온 세월. 이봉주는 당분간 휴식을 취하며 구체적인 진로를 모색한 뒤, 본격적으로 지도자 수업을 받을 계획이다. “재능있는 후배들은 많습니다. 문제는 훈련량이지요. 꼭 마라톤으로 제가 사랑을 돌려드리겠습니다.” 폭발적인 스피드보다는 끈덕진 지구력으로 세계를 평정한 그였다. 인생은 마라톤. 이제 이봉주는 또다시 태극띠를 두르고 제2막의 출발선 앞에 잔뜩 웅크렸다.

화성 | 전영희 기자 setupman@donga.com
사진 |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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