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고구려가 꿈꾼 건 大天의 상생세상”

  • 입력 2009년 4월 11일 02시 56분


고구려 말을 배경으로 여덟 아이의 모험을 그려낸 역사 판타지 소설 ‘고구려 국선랑 을지소’(랜덤하우스)를 펴낸 소설가 정지아 씨. 그는 “소설 쓰기에 한계를 두고 싶지 않았다”며 “이야기에 가장 잘 어울리는 형식을 고민할 뿐”이라고 말했다. 박영대  기자
고구려 말을 배경으로 여덟 아이의 모험을 그려낸 역사 판타지 소설 ‘고구려 국선랑 을지소’(랜덤하우스)를 펴낸 소설가 정지아 씨. 그는 “소설 쓰기에 한계를 두고 싶지 않았다”며 “이야기에 가장 잘 어울리는 형식을 고민할 뿐”이라고 말했다. 박영대 기자
◇고구려 국선랑 을지소/정지아 지음/352쪽, 392쪽·각 권 1만1000원·랜덤하우스

“부담감이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죠. 하지만 이야기에 따라 소설은 아주 다른 형식을 가질 수 있어요. 소설을 ‘장르’로 구분하는 것 자체가 이상하지 않나요?”

중견작가 정지아 씨(44)가 고구려 말을 배경으로 엘리트 무사교육기관 국선학당을 거쳐 간 소년들의 모험기를 다룬 역사판타지 소설 ‘고구려 국선랑 을지소’를 펴냈다. 빨치산 출신 부모의 체험을 소설화한 ‘빨치산의 딸’로 등단한 뒤 소설집 ‘행복’ ‘봄빛’ 등 개인의 삶에 남은 한국현대사의 상처와 모순을 형상화한 작품들을 써온 작가이기에 신작은 특히 새롭다. 본격문학과 장르문학의 경계가 엄격한 국내 문단에서 보기 드문 시도이기도 하다.

이 작품에서 국선학당에 모인 여덟 명의 국선랑은 각자의 사명을 가지고 있다. 태자 환권은 왕권 강화를 위해 비급을 훔치는 것이 목적이이며 정계의 실력자 연기춘의 두 아들 연일우와 연일복은 태자를 보필하는 동시에 감시한다. 돌궐 추장의 후손 흑무는 패망한 조국을 부활시키기 위해 왔다. 입신이 목적인 귀족출신의 우레미강, 생존을 위해 온 노비출신 나부, 연개소문의 딸 연이련 등도 마찬가지. 이들 중 유일하게 별 이유도 없이 친구 흑무를 따라 울며 겨자 먹기로 온 이가 주인공인 을지소. 을지문덕의 손자다.

함께 무예를 연마하고 최정예 무사집단인 조의선인이 되기 위한 관문을 거치면서 이들은 때로 대립, 갈등하며 조금씩 화합해간다. 이들의 대립과 화합 과정에는 고구려 말 권력자들 간의 정치적 이해관계와 갈등 등이 고스란히 엿보인다. 국선학당, 조의선인 등이 구체적으로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대해 사료에 남아 있는 기록은 없다. 작품의 배경이 되는 고구려 말의 정세 등을 제외하면 모두가 픽션이다. 마법사, 용 등이 등장하지는 않지만 국선랑들이 북두칠성의 기를 받으며 무예를 수련하거나 지장, 풍류장, 축지법을 다루는 것을 보면 무협소설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작가는 “고구려와 관련된 도·기의 세계를 다루고 싶은데 비현실적인 설정을 리얼리즘으로 풀 수는 없었다”며 “문제는 작품이 얼마나 좋은가 나쁜가이지, 본격문학인지 아닌지의 구분이 아니라고 본다”고 말했다.

이전과는 다른 형식을 시도할 만큼 이 주제에 매료당한 것은 2년여 전 기를 연구하는 이의원 선생으로부터 고구려 사상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받은 감화 때문이었다.

“동양사상의 핵심은 중화사상이었어요. 중화사상은 태양계를 중심으로 한 소천(小天)의 세계인데, 태양은 기본적으로 내가 제일이기 때문에 남을 굴복시킬 수밖에 없는 세계관이죠. 하지만 고구려의 경우 북두칠성을 중심으로 한 대천(大天)의 세계를 가졌어요. 자생과 공생을 꿈꾸는 사회죠.”

물론 역사적 사실 여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작가는 이를 그럴듯한 추론이라고 여겼다. 현재까지도 패권주의가 역사를 장악하고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지만 그것과는 다른 세계관을 가진 국가도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작가가 평소 바라던 사회의 모습과도 일치하는 것이었다.

이런 고구려 사회의 세계관이 캐릭터로 형상화된 것이 주인공인 을지소다. 영웅 을지문덕의 손자임에도 야심이나 지력이 떨어져 연개소문으로부터 ‘정말 바보 같은 놈’이란 말을 듣거나 ‘국선랑이란 걸 믿을 수 없을 만큼 유치한 질문’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천진난만한 소년. 남보다 잘하는 유일한 재주가 있다면 상대방의 처지나 상황에 공감하는 능력 정도가 전부. 사실 현실에선 딱히 재주라고 할 수도 없는 능력이다. 작가는 “두드러질 것도 없고 내세울 것도 없지만 성실하게 자기 삶을 가꿔가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아직 세상이 살 만한 것 같다”며 “사람의 감정 중 가장 아름다운 것이 연민이 아닌가. 그걸 가진 을지소 같은 사람들이 삶의 주인공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차기작은 아버지의 장례식을 소재로 전처럼 “무겁고 진지한 작품을 준비 중”이라 했다. 그는 “글을 쓸 때 한계를 둘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제 소설은 젊은 독자들이 읽기엔 어렵고 따분했을 텐데 이전과는 다르게 재밌게 읽어주는 것 같다”며 “앞으로도 장르에 특별한 제한을 두지 않고 다양한 작품을 써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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