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69년 콩코드기 시험비행 성공

  • 입력 2009년 3월 2일 03시 00분


초음속 여객기 시대

1950년대 들어 군용 전투기는 초음속을 달성했다. 그러자 항공 전문가들은 초음속 여객기(SST)에 대한 꿈을 키우기 시작했다.

1962년부터 영국과 프랑스가 초음속 여객기를 함께 개발하기로 했다. 1963년 프랑스 드골 대통령은 이 계획을 콩코드로 이름 붙였다. 콩코드는 프랑스어로 ‘화합’이라는 뜻.

초음속 여객기 개발은 지난한 과정이었다.

가장 큰 문제점은 경제성. 대형 여객기가 초음속으로 비행하려면 강력한 추진력의 엔진이 필요하지만 엔진은 연료소비효율이 나쁠 수밖에 없어 운항경비가 많이 들어간다.

다른 문제점으로는 초음속으로 인한 엄청난 소음과 환경 파괴를 들 수 있다. 초음속 여객기 개발을 생각하고 있던 미국은 이런 문제점이 예상되자 개발 계획을 포기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이를 개선하기 위해 연구를 거듭했다. 1968년 12월, 양국은 콩코드의 시제 1호기를 내놓았다. 동체의 재질은 주로 알루미늄 합금이었고 가늘고 긴 삼각날개와 4개의 엔진을 지닌 날렵한 모습이었다.

1968년 8월에 지상시험을 마친 콩코드는 1969년 3월 2일 수많은 항공 전문가가 지켜보는 가운데 시험비행에 들어갔다.

프랑스 남서부의 툴루즈 공항 활주로를 이륙한 콩코드는 29분 동안 프랑스 상공을 난 뒤 무사히 지상으로 돌아왔다. 인류 최초의 초음속 여객기가 비행에 성공한 것이다.

첫 시험비행 성공 이후 2대의 콩코드는 1969년 파리 에어쇼, 1970년 영국의 판보로에어쇼 등에 출품돼 그 위용을 과시했다. 이어 지속적인 시험비행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시험비행 성공 7년 만인 1976년 드디어 상업 비행이 시작됐다. 영국의 브리티시 에어와 프랑스의 에어 프랑스가 런던∼바레인, 파리∼리우데자네이루, 파리∼워싱턴, 런던∼워싱턴 비행을 시작한 것이다. 평균 시속 2000km. 대서양을 3시간 만에 돌파했다.

그러나 경제적 부담과 소음 문제 등으로 대서양 횡단 정기편은 오래가지 못하고 런던∼뉴욕, 파리∼뉴욕 구간의 부정기 전세기로만 운항됐다.

콩코드는 2000년 7월 25일 추락사고로 113명이 숨지는 등 심각한 위기에 직면했다. 게다가 2001년 9·11테러로 승객 수가 줄어들었다. 이 같은 악재가 계속되자 두 항공사는 엄청난 유지비의 부담을 극복하지 못하고 2003년 10월 24일 콩코드 시대의 막을 내리고 말았다.

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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