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87년 대우조선 노사분규 타결

  • 입력 2008년 8월 27일 02시 46분


1987년 8월 27일 오전 1시 40분.

양동생 대우조선 노조위원장과 노조 측 협상 대표들이 거제 옥포 대우병원에 모습을 나타냈다. 시위 도중 전경이 쏜 최루탄에 맞아 숨진 이석규(21) 씨의 시신이 안치된 곳이다. 노조 지도부가 분향소 앞 연단 쪽으로 다가가자 “수고했다”며 박수치는 소리와 함께 “해명하라”며 야유하는 목소리가 뒤섞여 어수선했다.

양 위원장은 감격에 겨워 울먹이는 듯한 목소리로 “근로자 여러분, 수고하셨습니다. 협상은 원만히 타결됐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여러분들의 처지가 곧 내 처지인 만큼 얻어낼 수 있는 데까지 얻어 내보려고 노력했습니다”라며 협상 결과를 발표했다.

같은 달 8일 시작해 19일 동안 진행된 격렬한 파업과 긴 협상 끝에 분규가 타결된 순간이었다. 대우조선 파업은 8일 낮 경남 거제군 장승포읍 옥포리 대우조선 사내운동장에서 근로자 수천 명의 연좌농성으로 시작됐다. 27일 0시 55분 옥포관광호텔 회의실에서 노사대표가 합의문에 공동서명한 뒤 악수를 하면서 협상은 마무리됐다.

노사 양측이 최종 합의한 사항은 회사 측이 주장한 급여인상액 4만 원과 근로자 측이 요구한 5만 원의 중간선인 4만5000원이었다. 기본급 1만5000원 인상에다 현장수당 1만5000원 인상, 주거수당 1만5000원 신설 등이 담겨 있었다. 노사분규 관련자와 구속자에 대해 회사가 관계기관에 선처를 건의하고 사무직 사원과 기능직 사원의 출입증 색깔을 통일하는 등 17개 합의사항을 이끌어냈다. 이 씨 장례는 7일장으로 치르기로 했다.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은 노사분규의 회오리에 휘말린 거제 현장에 내려와 묵으며 노조집행부와 직접 협상을 벌였다. 당시 조선산업은 극심한 불황에 시달리고 있었다.

1987년 대우조선 노조 파업은 노태우 민정당 대표가 대통령직선제를 수용한 ‘6·29 선언’ 이후 전국적으로 확산된 대표적인 노사분규 사건이었다.

7월 초 울산에서 현대엔진이 노조를 결성한 것을 시작으로 현대 계열사로 노사분규가 이어졌다. 7월 하순에는 부산의 대한조선공사(현 한진중공업) 국제상사 등 다른 대기업으로 파업이 번졌다. 8월 초 공장 밀집 지역인 마산과 창원 대구 구미 광주 전북 수도권 등으로 노동운동이 확산됐고, 8월 중순에는 전국 동시다발로 파업이 계속됐다.

당시 3저(低) 호황으로 경기가 좋아지면서 근로자들의 분배 욕구가 늘어난 데다 운동권 학생의 위장 취업과 재야 시민단체의 분규 현장 가세 등 노동운동에 정치 투쟁까지 가미됐기 때문이다.

지금은 조선업 호황으로 ‘알짜배기’가 돼 많은 대기업이 눈독을 들이고 있는 대우조선해양은 1987년엔 이처럼 노사분규의 대명사였다.

최영해 기자 yhchoi6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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