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구기자의 현장체험]볼쇼이 서커스 동물 조련사

  • 입력 2005년 2월 3일 15시 3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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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련사 발레리예브나 씨와 함께 자하르 앞 발에 링을 끼우는 연습을 했다. 이 날 자하르는 뭐가 못마땅한지 링 걸기를 거부하며 괴성을 지르기도 했다. 대전=강병기 기자
조련사 발레리예브나 씨와 함께 자하르 앞 발에 링을 끼우는 연습을 했다. 이 날 자하르는 뭐가 못마땅한지 링 걸기를 거부하며 괴성을 지르기도 했다. 대전=강병기 기자
“손 내밀어!” “공 굴려!”

명절 때면 TV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동물 서커스 묘기. 공 굴리고, 춤을 추고, 줄을 타는 동물들의 모습은 언제 봐도 신기하기만 하다.

그럴 리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쟤들이 혹시 사람 말을 알아듣는 것이 아닐까’하는 엉뚱한 상상도 해 본다.

마침 러시아 볼쇼이 서커스단이 내한 공연 중이라는 소식을 듣고 동물 조련에 참여하기 위해 순회 공연장 중 하나인 대전 충무체육관을 찾았다. 이 서커스단은 서울(4∼22일 올림픽 체조경기장)을 비롯해, 다음 달 20일까지 전국 대도시를 돌며 공연한다.

○ 볼쇼이 서커스단

300년 전통의 ‘볼쇼이 서커스’는 서커스의 대명사로 불릴 정도로 유명하다. 하지만 ‘볼쇼이’는 특정 서커스단 이름이 아니다. ‘위대한’ ‘거대한’이란 의미로 일정 수준 이상의 기량을 가진 단체에 러시아 정부가 붙여주는 호칭이다.

이번에 내한한 공연단은 러시아 내 양대 유명 서커스단 중 하나인 ‘러시아 국립 니쿨린 모스크바 서커스단’. 단원은 약 2000명으로 여기에 동물팀, 발레팀, 악단, 공중 곡예팀 등 수십 가지의 팀이 있고 같은 팀이라도 수준별로 몇 등급이 나뉜다.

한국에는 동물팀을 중심으로 발레팀, 악단 등 단원 50여 명과 곰 사자 말 개 고양이 등 동물 30마리가 왔다. 표범, 호랑이 등도 올 계획이었는데 통관상의 문제로 취소됐다.

○ 자하르 & 마카즈

처음에는 사자 조련에 참여하고 싶었지만 사자의 사나운 모습을 한 번 본 후 마음을 바꾸어 곰을 조련하기로 했다.

네 살 된 수컷 곰 자하르는 조련이 웬만큼 완성된 상태.

하지만 낯선 내가 손 내밀어, 일어서, 앉아 등 기본적인 명령을 한 시간 넘게 외쳐도 놈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훈련시킬 동안 옆에 조련사 바라노브 유리 씨가 있기는 했지만 자하르 앞에서는 상당히 조심 해야 했다. 언제 어떻게 돌변할지 알 수 없기 때문.

먹이도 항상 주는 조련사가 아니면 사실은 줘서는 안 된다. 다른 사람도 먹이를 준다는 것을 알게 되면 조련사 말을 잘 듣지 않는다고 한다.

조련은 먹이를 이용해 같은 동작을 몸에 배게 하는 과정의 반복이다.

예를 들면 공굴리기를 가르치려면 처음에는 사람이 부축해서 먹이를 주며 공 위에 세우는 동작을 반복한다. 곰이 ‘저 위에 올라가면 먹이를 먹을 수 있다’는 습관을 몸에 익힐 때까지.

다음은 공을 앞으로 굴리며 곰이 균형을 잡는 연습. 입 앞에 먹이를 보여주면 곰은 먹이를 먹기 위해 앞으로 걷게 된다. 공굴리기 묘기란, 곰 입장에서 보면 ‘공 위에 올라 눈앞의 먹이를 먹으러 가는’ 행위인 셈이다. 자하르는 이 동작을 익히는 데 반 년 정도가 걸렸다고 한다.

어떤 곰은 공굴리기, 어떤 곰은 줄타기 등 저마다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행위가 따로 있다고 한다. 그래서 초반에 곰이 어떤 동작을 싫어하면 그 묘기는 다시 시키지 않는다.

하지만 아무리 먹이를 흔들어대도 녀석이 손을 내밀지 않는 것은 그 동작이 싫어서인지, 나를 싫어해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 내가 조련 받는 거 아냐?

반면에 한 살짜리 아기 곰 마카즈는 먹이를 주지 않아도 쉽게 손을 내밀었다.

‘역시 어린 것이 때가 덜 묻었어….’

아무나 보고 손을 내밀고 혼자서도 잘 뒹군다는 점이 문제이긴 하지만….

한참 명령어를 외치다 보니 누가 조련을 받고 있는지 혼동이 된다.

놈이 한 동작을 하면 내가 그 다음 말을 하는 것 같은 착각. 가끔 틀리면 ‘얘가 왜 엉뚱한 소리를 하지? 먹이를 안 줘서 그런가’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자하르 손에 링을 끼우고 포즈를 취하는 연습을 하는데 놈이 자꾸 링을 안 받고 앞발로 툭 밀치기만 한다. 옆에 여자 조련사인 즈베린쎄바 예카테리나 발레리예브나 씨가 있기는 하지만 별 소용이 없다. 계속해서 링을 끼우려 하자 ‘우웨엑’ 거리며 앞발을 휘두르고 성을 내는 자하르.

너무 놀라 어느 틈에 한 10여 m를 도망쳤다.

온순한 동물이 서커스 묘기에는 제격일 것 같은데 사실은 그 반대다. 줄타기나 공굴리기 같은 묘기는 상대적으로 사납고 거친 성격의 동물이 잘 맞는다는 것. 쉽게 말하면 모험심이 강한 성격이 위험한 묘기를 잘한다는 것이다.

10여 년 경력의 발레리예브나 씨도 곰을 조련하다가 다친 적이 있다고 한다. 곰이 친근감의 표시로 한대 툭 쳤을 뿐인데 워낙 힘이 세다보니 맞는 사람 입장에서야 같을 수 있나.

곰들은 묘기가 끝나고 나면 관중에게 허리를 180도로 꺾고 큰 인사를 하는데 사실은 뒤에서 조련사가 주는 비스킷을 가랑이 사이로 머리를 집어넣어 먹는 행위이다.

먹고 살기 어려운 게 사람만은 아니다.

○ 금수회의록

동물과 함께 지내 보니 사람의 세계나 동물의 세계나 별 차이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당근과 채찍’은 어디서나 통용되는 법칙. 공연 날에는 오전 9시와 공연이 끝난 뒤에 먹이를 주는데 ‘너무 배부르지도, 배고프지도 않게’가 포인트다.

그래야 먹이를 먹기 위해 동작을 한다.

사람도 ‘적당한 월급의 수준’이란,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그만두지는 못하는 경계라는 우스갯말이 있으니….

일을 하면서 자아성취나 보람을 느끼는 사람과 어떻게 비교할 수 있느냐고 반문할지는 모르지만 줄을 타는 곰만큼 짜릿한 성취감을 느낄까?

공연기간 중 각 동물은 공연장 밖 대형 천막 서너 개 속에서 함께 생활한다(물론 우리는 따로 있다).

밤늦은 시간에 저들끼리 ‘금수회의’를 열지는 않을까.

‘인간들은 인분도 먹는대.’

‘하루에 3끼 먹자고 12시간씩 서커스(일)한다며?’

‘10년이 넘게 훈련(교육)받고도 말을 잘 안 듣나봐. 그래서 잡아가는 조련사(경찰), 가둬두는 우리(감옥)도 있대.’

‘하마도 그 정도 훈련받으면 잘 따라할텐데….’

대전=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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