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 삶]박철/침묵하는훈련

  • 입력 2005년 1월 2일 17시 4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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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벽두, 참으로 오랜만에 혼자 있자니 조용해서 좋다. 이따금 바람 서걱거리는 소리, 창문 흔들리는 소리가 들릴 뿐. 이렇게 사람 사는 세상이 조용할 수가. 지금 애들과 아내는 외출 중이다. 아무런 간섭도 성가심도, 아무 할 일도 없이 나를 본다. 그리고 내면의 소리를 듣는다. 침묵의 소리를 듣는다. 내 자신의 침묵의 세계에 들어가 보아야 한다. 얼마나 많은 말을 하고 살았는가. 의미 없는 말을 수없이 남발한다. 도무지 쓸데없는 말을 할 때도 있다. “말을 너무 많이 했구나”라는 자괴감이 꼬리를 물고 나를 괴롭힌 적도 있다.

말이 적은 사람, 침묵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사람에게 신뢰가 간다. 초면이든 구면이든 말이 많은 사람에겐 신뢰가 가지 않는다. 나도 어쩔 수 없이 많은 사람을 만나지만 말수가 적은 사람에게 오히려 내 마음을 열어 보이고 싶어진다. 사실 인간 사이의 만남에서 말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병에 물을 가득 채우면 소리가 나지 않는다. 그러나 물을 반쯤 채우면 소리가 난다. 초등학교 시절 나는 30리 길을 통학했다. 학교에서 도시락을 다 먹고 책보에 싸서 메고 돌아오면 ‘달그락’ 하고 소리가 난다. 뛰면 ‘달그락 달그락…’ 더 요란한 소리를 낸다.

우리의 인격도 마찬가지다. 꼭 필요한 말만 할 수 있어야 한다. 안으로 말이 여물도록 인내하지 못하기 때문에 밖으로 많은 말을 쏟아내고 만다. 좋지 않은 습관이다. 생각이 떠오른다고 불쑥 말해버리면 안에서 여무는 것이 없다. 그 내면은 텅 빈다. 말의 의미가 안에서 잘 여물도록 침묵의 여과기에서 걸러야 한다. 오늘날 인간의 말이 소음으로 전락한 것은 침묵을 배경으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말이 소음과 다름없이 다뤄지고 있다. 말을 안 해서 후회하는 일보다 말을 해버렸기 때문에 후회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인간은 강물처럼 흐르는 존재다. 늘 변한다. 날마다 똑같은 사람일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남을 함부로 판단할 수 없다. 말로 비난하는 버릇을 버려야 우리 안에 사랑의 능력이 자란다. 이 사랑의 능력을 통해 생명과 행복이 움튼다. 오늘날 우리의 과제는 잡다한 지식의 홍수에서 어떻게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가정에서나 사회에서나 또는 여행길에서도 우리는 조용히 자기의 내면을 관찰할 기회가 별로 없다.

가스와 연기로 세상이 더러워지는 것보다 무책임한 말, 언어의 남발로 세상이 질식할 만큼 오염됐다. 현대인의 특징은 조용히 사색하고 명상하며 기도하는 침묵의 시간을 잃은 데 있다. 그 시간을 잃어버림으로 천박한 생각, 얕은꾀만 늘었다. 그 천박하고 얄팍한 생활을 살아가려니 자신의 올무에 걸리게 되는 것이다. 약은 사람이 늘 잔꾀에 넘어진다. 사람들을 만나 떠들고 집에 돌아왔을 때 그렇게 마음이 공허하고 허전할 수가 없다. 공연히 지껄여 댄 자신이 한없이 부끄럽고 후회스러울 때가 있다.

인류 역사상 사람답게 살다간 사람들은 한결같이 침묵과 고독을 사랑한 사람들이었다. 나는 구도자(求道者)의 길을 제대로 걸어 왔는가. 사람들에게 말로 가르칠 것이 아니라 몸으로 본을 보여야 할 것 아닌가. 가급적 말을 적게 하고, 그러나 따스한 가슴은 지니고 살아야 할 것 아니겠는가.

박 철 좋은나무 교회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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