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세기 전엔…]동아일보로 본 11월 둘째주

  • 입력 2004년 11월 7일 18시 3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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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끝난 뒤 남편을 잃은 여성들은 모자원에 입소해 1년여 동안 양재, 미용 등의 기술을 배워 자립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했다. 책 ‘여성, 전쟁을 넘어 일어서다’에 실린 사진. 사진제공 서해문집
전쟁이 끝난 뒤 남편을 잃은 여성들은 모자원에 입소해 1년여 동안 양재, 미용 등의 기술을 배워 자립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했다. 책 ‘여성, 전쟁을 넘어 일어서다’에 실린 사진. 사진제공 서해문집
살길 漠然한 戰爭未亡人 닥쳐오는 嚴冬에 救護策 時急

바느질 품삯, 달라 장사 등으로 연명하고 있는 전쟁미망인들은 엄동을 앞두고 기한(飢寒)을 면할 길이 더욱 막연하여지고 있다. 전쟁으로 인하여 졸지에 ‘전쟁미망인’이 된 부인은 약 三십만 명에 달하고 있는데 이들은 바느질, 식모살이, 담배장사, 가두구걸 등 갖은 고생 속에서도 윤락만을 면하려고 사투를 하고 있는데 정부에서는 이들에 대하여 별로 이렇다 할 대책이 없는 형편에 있다.

현재 국가에서 구호하고 있는 상태를 보면 서울국립모자원에 二백 명, 전남 경남 서울 등 지방모자원에 三백 명, 二개소 갱생원에 二백 명을 수용하고 겨우 급식할 정도이고 이 밖에 일반 민간유지의 구호로서 약 一천 명 정도를 수용하고 있을 따름이다.<동아일보 1954년 11월 9일자에서>

사회의 편견에 두번 운 ‘전쟁미망인’

6·25전쟁으로 남편을 잃은 30만명의 여성들은 남편의 부재를 슬퍼할 겨를도 없이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1955년 보건사회부 부녀국 조사에 따르면 남편이 있는 여성의 경우 직업을 가진 비율이 9.6%에 불과했던 반면 이들 중에선 88.8%가 경제활동에 종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숙식을 해결하며 기술을 배울 수 있는 모자원에 들어가는 것은 극히 운이 좋은 경우였다. 모자원 입소는 원장 등의 소개로 이뤄졌기 때문에 그 자체가 특권이었다. 당시 ‘남자 한 명에 여자 한 트럭’이라는 말이 유행일 정도로 여성 과잉 상태였기 때문에 재혼도 쉽지 않았다. 미군부대 주변에 기지촌이 형성되면서 사창가로 흘러드는 이들도 생겨났다. 1957년 중앙 성(性)병원 조사에 따르면 홀로 된 뒤 매춘의 길로 들어선 여성은 2만3000여명에 이르렀다. 이들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남편 없이 경제권을 쥐게 된 여성들이 쉽게 향락과 허영에 빠져든다는 비난의 소리가 높아갔다. 결국 변변한 구호대책도 없는 상황에서 그들에게 요구된 것은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면서도 가부장적 정절과 부덕을 갖춘 ‘이중적’ 여인상이었다.

정미경기자 micke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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