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세기 전엔…]동아일보로 본 9월 넷째주

  • 입력 2004년 9월 19일 18시 4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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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이후 미군과 함께 이 땅에 들어온 양담배는 엄연히 판매금지 품목이었다. 그러나 시장통에는 호구지책으로 양담배 등 미제 물건을 내놓고 파는 노점상이 많았다. -‘서울20세기’사진집 자료사진
광복 이후 미군과 함께 이 땅에 들어온 양담배는 엄연히 판매금지 품목이었다. 그러나 시장통에는 호구지책으로 양담배 등 미제 물건을 내놓고 파는 노점상이 많았다. -‘서울20세기’사진집 자료사진
▼收復地 慰問用 洋담배 三万匣 어디로…市中 押收品 某黨서 無料 受配▼

전매청에서는 시중에 범람하는 양담배를 압수하여 이의 적절한 처리방법을 강구 중에 있던 바 수복지구 및 기타 군경 위문용으로 사용하는 것이 가장 유익하겠다는 데에 의견의 일치를 보아 압수된 양담배에 ‘위문용’이라는 ‘넷텔’을 붙인 후 각종 기관의 요청에 의하여 무료 배부하여 주었다는데 요즘 시장에서는 이러한 ‘위문용’이란 ‘넷텔’이 붙어 있는 양담배가 범람하여 시민들의 의아감을 적지 않이 사고 있다.

그런데 소식통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자유당 중앙당 간부인 모씨의 명의로 ‘三八이북 수복지구 군대 위문용’이라는 명목으로 전매청에 보관중인 영제(英製) 담배 三만 갑을 할당받은 사실이 있다는 바 수복지구 현지를 시찰한 의원들은 한 갑의 양담배도 현지군경에 수여한 사실이 없을 뿐만 아니라 전매청에 담배도 요청한 바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동아일보 1954년 9월 22일자에서>

▼입수한 양담배 집권당 간부들이 내다팔아▼

세칭 ‘양담배 사건’은 1954년 집권 자유당 간부들이 일선장병 위문용으로 공급받은 양담배를 시장에 내다팔아 착복한 사건이다. 그들이 빼돌린 양담배는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양키 물건’으로 보따리 장사를 하며 끼니를 잇던 영세상인들로부터 압수했던 것인지라 ‘벼룩의 간을 내먹어라’는 비난이 빗발쳤다. 관련 뉴스가 연일 신문지면을 장식하는 가운데 전매청장, 내무장관 등이 국회에 불려나가 야당 의원들로부터 호된 질타를 받았다.

이승만 정부는 국산담배 배급에 장애가 된다는 이유로 1953년 10월 양담배 판매를 금지하고 이듬해 6월까지 약 15만갑의 양담배를 강제 수거했다. 그러나 양담배 금지 이후에도 양담배를 찾는 발길은 끊이지 않았다.

양담배는 한국인들이 가장 손쉽게 미국문화를 모방할 수 있는 수단이었을 뿐 아니라 국산담배를 사려면 배급소에서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던 것과 달리 줄을 서지 않아도 돼 인기가 높을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양담배는 필터형 제품으로, 막궐련인 국산 담배보다 질이 월등했다. 최초의 국산 필터 담배는 ‘아리랑’으로, 1958년에야 비로소 선보였다.

수입판매금지 품목인 데다 비(非)애국과 사치의 상징으로 여겨져 음성적으로만 유통되던 양담배가 양지로 나온 것은 1986년. 한미통상협정 체결로 공식 판매가 허용된 것이다. 다시 2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지금, 양담배에 대한 터부는 없어졌지만 이제 담배 자체가 ‘혐오 대상’이 되어버렸다.

정미경기자 micke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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