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세기 전엔…]동아일보로 본 8월 다섯째주

  • 입력 2004년 8월 29일 18시 4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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앰뷸런스, 군용차량 등으로 북한에서 비무장지대까지 운반된 국군 유해들은 특별열차편으로 서울로 옮겨졌다. 6·25전쟁 후 유해 교환이 이뤄진 첫날 변영태 당시 국무총리 등 주요 인사들이 직접 비무장지대까지 나가 헌화했다.-사진제공 국가기록영상원
앰뷸런스, 군용차량 등으로 북한에서 비무장지대까지 운반된 국군 유해들은 특별열차편으로 서울로 옮겨졌다. 6·25전쟁 후 유해 교환이 이뤄진 첫날 변영태 당시 국무총리 등 주요 인사들이 직접 비무장지대까지 나가 헌화했다.-사진제공 국가기록영상원
▼北쪽 땅에 侵略者 남긴 채 말없이 돌아오는 ‘自由’의 守護神▼

전사상에 일찍이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엄숙한 의식인 역사적 시체 교환이 금일 상오 九시 반부터 중립지대 남단에 마련된 교환본부에서 행하여진다. 휴전협정이 규정하는 바에 의하면 유엔 측과 공산군 측 각각 四명으로 구성된 묘지등록위원회가 협의 작성한 행정협정에 의해 유엔 측은 공산 측에게 一만四천六십九구의 시체를 인도할 것이며 공산 측은 유엔 측에 四천十一구를 인도할 것이다. 동 인도는 금 一일 상오 九시 반부터 행하여질 것인 바 협약에 의거하여 오전 중에 공산측이 먼저 인도하고 오후 十二시반부터 유엔 측이 인도할 것으로 (…)

<동아일보 1954년 9월 1일자에서>

▼남북군인 유해교환…1만8천여구 ‘집으로’▼

‘역사적’인 남북한 군인 유해교환이 이뤄진 첫날 부슬비가 내렸다. 국군 유해 인수지였던 비무장지대 남쪽 마을 파주시 장단면 동장리에서는 위령제가 열렸고, 유해를 실은 특별열차가 도착한 서울 용산역에선 1만여명의 시민이 참가한 가운데 영결식이 열렸다.

전쟁당사국간에 생존포로의 교환은 관례적으로 이뤄지나 2만구에 가까운 유해가 한꺼번에 교환된 것은 유례가 없는 일. 유엔측이 강력하게 유해교환을 요구했다.

우여곡절도 많았다. 휴전에 반대하던 이승만 정부는 포로나 유해교환 등의 전후 처리에 나설 생각이 전혀 없었다. 1952년 포로교환이 시작됐으나 이 대통령은 오히려 반공포로 2만6000여명을 석방하는 등 협상에 비협조적이었다. 북한은 즉각 포로송환을 거부했고 유해교환 계획도 중단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이에 놀란 미국은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과 원조 확대라는 ‘당근’으로 겨우 이 대통령을 설득했다.

유해교환은 한 달간 계속됐다. 유엔측이 인수한 4011구 중 국군 유해는 2144구로 6·25전쟁 중 북쪽에서 숨진 것으로 추정되는 2만여명의 10분의 1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유엔군 유해였다.

유해송환 문제는 그 뒤 세인의 관심에서 멀어졌으나 1990년 이후 미국이 북한으로부터 285구의 미군 유해를 돌려받으면서 다시 ‘현안’으로 부상했다.

미국은 북측에 600만달러의 보상비까지 주면서 유해를 인수했지만 남북화해 국면이 꼬이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는 우리 정부는 생존포로 송환은 물론 유해 회수에도 소극적일 뿐이다.

‘국가는 결코 애국자를 저버리지 않는다’는 백마디 말보다 나라를 위해 싸우다 숨진 한 명의 희생자를 찾는 데 최선을 다하는 게 필요하지 않을까.

정미경기자 micke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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