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최상철/'수도이전' 국민투표 거쳐야

  • 입력 2003년 11월 20일 18시 4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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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연구’라는 방대한 역사서를 쓴 아널드 토인비 교수가 마지막으로 남긴 저서는 수도(首都)의 역사에 대한 것이다. 수도의 변천사를 보면 그 나라의 역사와 세계의 역사를 읽을 수 있다고 했다. 수도를 옮긴다는 것은 새로운 역사의 창조이며 시대정신의 표현이다. 수도의 이전은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될 일이다. 수도는 한 나라와 한 민족의 정통성의 상징이며, 정신적 구심점이며, 국위의 표상이다.

▼입법 사법부까지 옮긴다면 遷都 ▼

그런데 우리나라의 경우 지난해 대통령선거 막바지 유세 과정에서 불쑥 수도 이전 얘기가 튀어나오더니 드디어 국회에 ‘신행정수도건설 특별조치법’의 상정에까지 이르렀다. 그냥 지나가는 말이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이 우리를 심각하게 만들고 있다. 지난해 대선 때는 4조원 정도면 된다던 신행정수도 건설비가 45조원으로 발표됐고 충청권은 부동산 투기장으로 변하고 있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충청권 표를 잃을까봐 그런지 어떤 정당도 이렇게 중요한 수도 이전 문제에 대해 입을 다물고 있다.

정부는 신행정수도라는,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개념을 내세워 국민을 당황케 하고 있다. 지금의 신행정수도 계획은 1977년 박정희(朴正熙) 대통령 시절 통일될 때까지 안보적 차원에서 임시로 행정기능만 옮기려던 구상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발상이다.

행정부뿐만 아니라 입법 사법부까지 이전한다면 그것은 바로 수도 이전, 즉 천도(遷都)다. 그것도 남북이 통일되더라도 수도로 기능할 수 있는 항구적 수도를 건설하겠다는 것이다. 왜 천도라는 말 대신 신행정수도 건설이라는 표현으로 국민을 혼동케 하는지 모르겠다.

수도를 옮기는 데는 이유가 있어야 한다. 정부는 수도권 집중 문제를 해소하고 지역균형발전을 도모한다는 것을 가장 큰 명분으로 내세우고 있다. 수도권의 인구 50만명을 분산시키고 국가 균형발전을 가져올 것이란 막연한 기대를 하고 있다. 그러나 통일이라는 민족적 염원을 실현하기도 전에 수도를 남쪽으로 이전하는 것은 통일 의지의 후퇴로 비칠 수 있다. 또 ‘충청권 행정수도’는 이미 수도권으로 흡수되고 있는 충청권의 수도권화를 가속화시킬 수 있다. 수도권으로부터 출퇴근 거리에 신수도를 건설함으로써 다른 지역의 발전 잠재력을 빨아들여 또 하나의 ‘블랙홀’을 만드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나라살림이 이렇게 어려울 때 엄청난 국력을 소모하면서 천도를 해야 하는지도 의문이다. 45조원이 든다고 하지만 다른 국책사업의 경험으로 본다면 100조원도 넘을 것 같다. 경부고속철도 건설도 당초 8조원이 든다고 했으나 실제로는 20조원에 육박하고 있다.

45조원이라고 믿는다 하더라도 수도권 인구 50만명을 분산시키기 위해 한 사람당 거의 1억원에 해당하는 돈이 들어가는 셈이다. 아마 수도권에 살고 있는 주민에게 1인당 1억원씩 준다고 하면 수백만명이 지방으로 옮겨갈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이만한 재원이면 호남고속철도도 만들고 지방 국립대학마다 1조원씩 투자해 지방의 자존심을 살리고 지방혁신을 하고도 남을 것이다. 신행정수도 건설에 투자할 재원이 있다면 진정 지방발전을 위해 쓰는 것이 국가 균형발전의 길이라고 생각한다.

▼대선공약 국민적 합의로 볼수없어 ▼

가장 중요한 것은 수도 이전에 대한 국민적 합의 과정이다. 선거 때 행정수도 이전 공약을 내세운 사람이 당선됐다고 국민적 합의가 이뤄졌다고 볼 수 없다. 신행정수도건설특별조치법이 국회를 통과한다고 해도 천도에 대한 국민적 합의를 봤다고 할 수 없다.

수도 이전은 백년대계가 아니라 천년대계다. 이 문제야 말로 국민투표의 대상이다. 우리보다 잘사는 나라들은 수도 이전을 거론하지 않는다. 20세기에 들어와 수도 이전을 한 나라들은 하나같이 국력의 소진으로 가난의 늪에서 헤매고 있다. 브라질 터키 파키스탄 나이지리아 등이다. 일본도 10년 이상 수도 이전을 논의만 하고 있지 실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수도 이전 문제는 보다 큰 역사적 맥락에서 이뤄져야 하고 국민적 합의가 선행돼야 할 것이다.

최상철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신행정수도 재고를 촉구하는 국민포럼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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