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성의 나무]<11>소설가 이문열

입력 2003-06-23 18:49수정 2009-10-10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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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열씨는 한국 문단을 대표하는 작가인 동시에 한국 사회의 보수우파를 대변하는 논객이다.-동아일보 자료사진
한국을 대표하는 소설가이자 보수우파를 대변하는 논객으로 주목받는 작가 이문열(55). 그는 ‘사람의 아들’ ‘금시조’ ‘젊은 날의 초상’ ‘영웅시대’ ‘변경’ 등으로 현대 한국문학사를 장식하며 정열적인 작품활동을 펼치는 한편 ‘진보’만이 한국사회를 위한 유일한 방향인지에 대한 반성적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고 있다.

그는 “왜 작가가 됐는지 더 이상 묻지 말아 달라”고 했다. 어쩌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작가가 돼 있었지만 사실 작가가 아닌 다른 삶에 대한 미련을 40대 중반까지도 버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경북 영양의 명문가인 재령 이씨(載寧 李氏)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문학과 같은 사장지학(詞章之學)보다는 경학(經學)과 같은 체계적 학문을 공부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의 삶은 6·25전쟁 때 월북한 부친과 그로 인한 연좌제에 얽매였다. 갈등 속에서 보낸 중고등학교와 대학 시절 10년 중 그가 실제로 학교를 다닌 것은 2년반에 불과했다. 최소한 7년반의 세월은 혼자서 떠돈 셈이다. 이 시절 그가 가장 많은 시간을 투여했고 또 가장 많이 위안을 받았던 것이 글쓰기였다.

작가 아닌 다른 길을 찾기 위해 고시공부도 해 봤지만 나이 서른이 되고 보니 그는 어느새 작가가 돼 있었다. 하지만 다시 대학으로 돌아가서 체계적인 학문을 해보고 싶다는 미련을 버리기 어려웠다. 작가 인생을 받아들인 것이 40대를 거의 마감할 무렵이었으니 그가 작가로서 안정된 마음을 가지고 작품을 쓰게 된 것은 아직 10년도 채 안 되는 셈이다.

애초부터 작가가 될 생각을 가진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일찍부터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도구로 ‘문장’을 대단히 중요하게 여겨 왔다. 그래서 문장의 구성과 서술방식, 혹은 사고와 발상법 등에 대해 은연중에 훈련을 해 왔다. 한국문단에서 그의 작품이 탄탄한 문장과 구성으로 정평이 나 있는 것도 이런 시절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작가가 될 생각을 하고 습작을 시작한 것은 서울대 사범대 재학시절 사대문학회에 참여하면서부터다. 대학 1학년 때 회원들의 작품을 발표 토의하는 ‘주말합평회’에서 그는 ‘이 황량한 역에서’라는 단편소설을 발표했다. 40분 정도를 읽어 내려가는 동안 발표장 안은 고요해졌고 발표가 끝나자 참석자들의 찬사가 이어졌다. 당시 주말합평회에서는 정말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것이 그의 첫 소설이었다. 그는 이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을 잊지 못한다. 그가 작가 아닌 길을 찾아 방황하면서도 결국 작가의 길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것은 바로 이 잊지 못할 ‘첫 키스’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그의 어린 시절을 사로잡았던 것은 감성적인 문학작품들이었다. 그는 한국문학보다 세계문학을 주로 접했고 그 중 헤르만 헤세, 앙드레 지드 등 감수성을 자극하는 작품을 좋아했다. 하지만 10대 후반∼20대 초반에 접어들면서 지적인 작품들을 찾기 시작했다. 그 시기는 실존주의 시대였다.

1960년대 중반 실존주의가 한창 유행할 때 그는 고등학생이었고 실존주의의 황혼기에 대학을 다녔다. 처음에는 실존주의가 어렵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곧 알베르 카뮈나 장폴 사르트르 등의 문학작품을 좋아하게 됐다. 이어 프리드리히 니체, 쇠렌 키르케고르 등 철학자들의 글도 즐겨 읽었다. 자신의 실존에 대한 반성과 탐구는 그 시대의 젊은이로서 피할 수 없었다.

20대 중반 문학을 떠나 고시를 준비했지만 20대 후반에는 아나키즘에 경도되기도 했다. 미하일 바쿠닌과 알렉세예비치 크로포트킨의 책을 읽었고 당시 경북대의 소장학자로 아나키스트였던 하기락 교수에 심취하기도 했다.

한때는 ‘백경’의 작가인 허먼 멜빌에 푹 빠진 적도 있었다. ‘백경’에 등장하는 고래를 그냥 동물이 아니라 저항할 수 없고 극복할 수 없는 어떤 절대 존재로 여기며 신비적인 의미를 부여하기도 했다. 지금 돌아보면 과장됐다는 생각도 들지만 당시에는 미국에 갔을 때 도서관에서 멜빌 관련 자료를 잔뜩 모아올 만큼 심취했다. 이처럼 그는 시기에 따라 특정한 대상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심취해 과대평가하며 다시 솔직하게 이를 반성하면서 균형감각을 찾곤 했다. 작품에 드러나는 폭넓은 지적 편력은 이렇게 이뤄졌다.

요즘 특별히 좋아하는 작가로 아르헨티나 작가인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를 든다. 화려한 발상으로 휘황찬란한 지적 유희를 펼치는 그의 스타일을 좋아한다. 정밀하고 치밀한 관찰과 분석보다는 화려한 발상과 창조적 메시지를 좋아하는 그에게는 역시 경학보다는 사장지학이 어울리는 듯하다.

그는 1989년 한 일간지에 ‘그리스도를 목매단 사람들’이란 글을 실었다. 평양에서 열린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한 임수경씨를 데리고 오겠다며 문규현 신부가 북한으로 갔다는 소식을 듣고서 통일지상주의의 무책임한 낭만성을 비판한 것이었다. 이때부터 이문열은 한국사회에서 공인된 보수우파로 ‘낙인’ 찍혔다.

사실 참여문학 논쟁이 한창이던 1980년대 중반까지 그는 사회적 발언을 거의 하지 않았다. 그저 개인적으로 글을 쓰는 것이 좋아서 쓸 뿐이었다. 그가 중시한 것은 사회성보다 ‘사인성(私人性·privacy)’이었다.

그러던 이문열이 1980년대 후반부터 사회적 발언을 하기 시작한 것은 자신이 사회로부터 과도한 ‘대접’을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사회에 대한 부채를 갚아야겠다고 생각하며 이 사회를 위협하거나 퇴행시키는 것에 자진해 맞섰다. 이는 다수의 사람들이 안정적으로 풍요롭게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꾸밈없이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는 성격으로 인해 그는 보수우파를 대변하는 상징적 인물로 지목돼 수난을 당하기도 했다.

그는 본래 ‘사인성’을 중시했고 작품에서 일관되게 추구해 온 것도 바로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종교 사상 체제 등에 맞서는 것이었다. 요즘 사회적 발언을 하는 것도 “예술가가 억압의 메커니즘으로 작용하는 정치 편견 종교 등에 대해 불평하고 짜증을 내는 것인지 모른다”고 말한다.

사회에 대한 그의 발언은 결국 자유를 억압하는 것에 대한 저항이다. 그렇다고 무제한의 자유를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현재 수준의 사회를 만들기 위해 사람들이 바친 노력과 고통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고 말한다. 일단 다수의 사회구성원들이 현 체제를 부정하고 새로운 체제를 만들기로 합의하기 전까지 합의한 체제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고 이를 위해 교육도 이 사회의 구성원들이 합의한 현 체제에 부합되도록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자신을 ‘보수우파’라고 이야기한다.

요즘 이문열은 두 마음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다. 하나는 자신을 과분하게 대접해 주는 사회를 위해 발언을 계속해야 한다는 의무감이고 또 하나는 이제 50대 중반에 들어선 작가로서 작품에 전념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란다는 조급함이다.

작품을 통해 사회에 대해 발언하면 되지 않겠느냐는 질문에 “작품을 쓸 때는 의도적으로 시의성을 무시한다”고 대답했다. 현재의 세상을 바꾸려는 글보다는 좀더 보편성을 담은 글을 쓰고 싶다는 것이다. 그의 작품 대부분이 시대를 넘어 오래도록 읽히는 이유를 알 수 있다.

일부 과격파들에 의해 작품이 불태워지는 시련까지 겪은 그는 얼마 전 담배도 끊고 술도 줄이며 몸과 마음을 추슬렀다. 그리고 다시 집필실에서 세상을 바라본다.

김형찬기자·철학박사 khc@donga.com

“지금 모두 감정만 앞세워 친일, 친일파, 하고 떠드는데 나는 정말 걱정되네. 이러다가 정작 처단해야 할 악질 매국노까지 다 빠져나가게 만들고 마는 게 아닌지 모르겠어. 엄밀하게 정도와 범위부터 규정해 친일파를 무력한 소수로 만들어놓고 처단하든지 말든지 해야 하는데… 지금같이 중구난방으로 범위를 확대해 면서기에서 지서(支署) 소사(掃使)까지 친일파를 만들어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나라 팔아먹고 동족 때려잡아 떵떵거리며 살던 놈들까지 한덩어리가 되어 얼씨구나, 다 빠져나가고 말지….”

그로부터 한달 뒤 미군이 인천에 상륙한 뒤에도 진정한 해방은 오지 않았다. 일본 식민통치의 경험을 인계하다시피 활용한 미 군정이 끝난 삼년 뒤에서 마찬가지였다. 적어도 친일파 청산이 우리 해방의 진정성을 담보하는 상징적 과업으로 보는 입장에서 보면, 대한민국이 선 뒤에도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그 여름의 자화상’(2001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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