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프리즘]최재천/과학이 문화처럼 느껴질때

  • 입력 2003년 2월 18일 18시 4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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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정신분열증을 앓고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수학자 존 내시의 일생을 그린 영화 ‘뷰티풀 마인드’에는 다음과 같은 청혼 장면이 나온다. 별로 낭만적이지 못한 내시의 청혼에 그의 부인이 되어 평생 동안 뒷바라지를 한 앨리시아도 만만치 않게 엉뚱한 질문을 던진다.

“우주가 얼마나 큰가요?”

“무한대로 크지요.”

“당신은 그걸 어떻게 아나요?”

“우주가 무한대로 크다는 충분한 자료가 있기 때문에 알지요.”

“하지만 아직 증명이 된 건 아니지요?”

“아니지요.”

“사랑도 아마 마찬가지겠지요.”

▼‘대충대충’ 없는 합리적 사회▼

과학자로서 할 얘기인지는 모르겠지만 모든 걸 명확하게 증명할 수 있고 결과 또한 공식에 의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예측할 수 있는 게 인생이라면 별로 살 맛이 나질 않을 것 같다. 우연(偶然)이 필연(必然) 못지않게 우리 삶에 중요하다는 건 과학도 인정한다. 언젠가 유학시절에 들었던 ‘미국은 재미없는 천국이고 한국은 재미있는 지옥’이라는 말이 생각난다.

나 역시 그 재미없는 천국을 뒤로하고 이 재미있는 지옥으로 돌아온 사람이지만 이젠 좀 재미가 덜 하더라도 어느 정도 결과를 예측할 수 있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모든 게 공식에 따라 결정되는 세상은 사실 숨 막히도록 재미없는 곳이겠지만 요즘처럼 마구잡이로 공식에 어긋나는 세상은 정말 처음 본다.

우리는 지금 극도의 불신과 방황의 시대에 살고 있다. 대북 송금에 얽힌 의혹을 풀기 위해 대통령이 직접 국민 앞에서 사과까지 했건만 그걸 그대로 믿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해명을 뒷받침할 만한 충분한 입증자료가 제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자료가 제시된들 무엇하랴. 그 자료 자체를 믿지 못할 터인데. 투명해져도 당분간은 진실을 알아보지 못할 것 같다.

새 정부가 해야 할 중대사가 어디 한두 가지랴마는 나는 그중 가장 중요한 일은 다름 아닌 과학이 문화가 되는 사회를 건설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전 세계가 하나의 거대한 무한경쟁 체제로 묶여 있는 상황에서 과학기술의 발전만이 경제와 문화를 함께 살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이런 시점에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우리 사회를 과학에 기반을 둔 사회로 만들겠다고 발표한 것은 일단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과학은 이미 보편적인 문화현상은커녕 극히 일부만이 하는 특수 행위가 돼버렸다. 실제로 우리 생활에서 과학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을 찾기 어렵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과학은 몰라도 되는 것처럼 살고 있다. 고흐나 모차르트를 모르면 흉이 돼도 과학은 잘 모르는 게 오히려 고상해 보이는 이상한 사회에 살고 있다.

과학이 문화가 되는 사회란 과연 어떤 사회인가. 문화가 모두 과학적이 돼야 한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다만 과학이 문화의 일부로 확고하게 자리잡아야 한다는 뜻이다. 사회의 구성원 모두가 다 나노과학자일 필요는 없다. 하지만 구성원 대부분이 기본적인 과학 지식을 갖추고 과학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삼풍백화점과 성수대교를 붕괴시킨 적당주의가 사라질 수 있다. 그래야 로또복권 광풍 같은 것도 쉽사리 일지 못한다. 그래야 노력한 만큼 보답받는 세상이 열린다.

▼연구개발비 3배 이상 늘려야▼

과학문화사회는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니다. 지금까지 해온 적당주의 정책으로는 절대로 이룰 수 없다. 사회개혁은 바로 과학정책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과학기술 연구개발비가 선진국 수준이라는 궁색한 변명일랑 이제 집어치우자. 상대비율이 아니라 절대규모를 파격적으로 늘리지 않는 한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 정부의 연구개발비 절대규모를 미국과 일본 수준에는 못 미치더라도 최소한 독일 수준까지는 끌어올려야 한다. 이는 현재 규모의 적어도 3∼4배를 의미하는데, 대통령과 과학기술부 장관이 앞장서서 국민의 호응을 끌어내주기 바란다. 그래야 과학이 문화가 될 수 있다.

최재천 서울대 교수·생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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