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신간]'프라그마티스트 미학' 예술철학 '자기혁신의 길'모색

  • 입력 2002년 8월 23일 17시 31분


◇프라그마티스트 미학/리처드 슈스터만 지음 김광명 김진엽 공역/367쪽 1만2000원 예전사

오늘날처럼 미와 예술에 관한 다양한 담론이, 그 보다 더 많은 종류의 매체를 통해 소통되고 소비된 적은 없었다. 대학 강단에서 TV의 교양강좌, 그리고 디자인 잡지에서 인테리어 전단까지 온통 생활을 아름답고 예술적으로 만들기 위한 이미지들이 쉴 새 없이 쏟아진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미학과 예술철학은 넘쳐나는 미적 경험과 예술적 실천을 거의 속수무책으로 바라만 보고 있다. 이 씁쓸한 아이러니의 원인은 무엇인가? 변화하는 현실의 뒤를 따라갈 수밖에 없는 것이 모든 이론의 운명이라 하더라도, 현금의 예술철학의 이론적 무기력증은 보다 통렬한 자기성찰과 자기혁신을 요구하는 것이 아닌가?

이러한 문제의식의 맥락에서 미국 템플대 철학과 교수인 슈스터만(R. Shusterman)의 저서 ‘프라그마티스트 미학’이 한국어로 번역된 것은 대단히 반가운 일이다. 이 책은 전통과의 비판적인 대화를 모범적으로 실천하면서, 예술철학이 어떤 방식으로 자기혁신을 이룰 수 있는가를 설득력 있게 보여주고 있다. 저자의 전략은 크게 보아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는 모더니즘 미학의 토대가 되어온 미적 경험개념과 예술개념의 파괴이다. 슈스터만은 이른바 ‘무관심적 경험’이 기초하고 있는 이데올로기적 관심과 억압을 폭로하고, 예술의 자율성·독립성이란 신화가 그 자체 물신화되어 결과적으로 비생산적으로 화석화되었음을 지적한다. 그는 모더니즘 미학이 암암리에 쌓아놓은 경계들을 - 무관심/욕망, 삶/예술, 관조/실천, 고급예술/대중예술, 쾌감/교훈 등 - 하나씩 무너뜨리는데, 이 때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미적 경험에 대한 존 듀이의 폭넓고 중층적인 구상이다. 필자는 듀이의 예술(경험의)철학이 가진 풍부한 잠재력을 이만큼 효과적으로 부활시킨 예를 본 적이 없다.

슈스터만의 두 번째 전략은 의도주의와 형식주의로 대표되는 모더니즘 미학의 작품 해석방법에 대한 비판적 검증이다. 그는 의도주의에 함축된 저자 개념에 대한 바르트의 논박과 데리다의 차연 개념을 통한 형식주의 비판을 수용하여 해석의 개방성과 다양성을 인정하지만, 이 다양성을 해석의 전통과 문맥 속에서 제어하는 역사주의적 관점을 견지한다.

슈스터만의 세 번째 전략은 주요 분석미학자들의 노력이 어느 지점에서 미흡한가, 또 유럽의 미학적 논의가 어떻게 협소한 엘리트주의에 빠져 있는가를 정확히 짚으면서, 자신이 기획하는 ‘프라그마티스트 미학’의 필요성을 정당화하는 일이다. 이 과정에서 그는 모더니즘 미학이 대중예술에 대해 직접적으로 표명한, 혹은 암묵적으로 품고 있는 여러 불만들을 하나하나 들춰내면서 논박하고 있다. 이 부분에서 드러나는 저자의 학자적 성실성, 특히 개별 논점들에 대한 정치한 분석은 재차 음미해 볼 가치가 있다.

그는 이어 ‘프라그마티스트 미학’의 구체적인 적용 사례로서 대중예술인 랩 음악 중 한 곡을 선정, 정밀한 해석을 가한다. 이로써 아방가르드 이후 예술의 변화를 직시하고 대중예술을 적극적으로 아우르면서, 감각적 즐거움이요 사회적 실천이며 생명의 표현인 미적 경험의 바다로 나아가고자 하는 이론적 기획의 면모가 확연히 드러난다.

물론 미학적 모더니즘을 일종의 잘 짜여진 이론틀로 간주하고 있는 점, 미학적 모더니즘의 문화(사상)비판적 함의를 평가하는데 인색한 점, 미적 경험의 듀이적 확장이 가져올 수 있는 개념적 모호성의 위험 등 아쉬움도 있다. 그러나 이런 아쉬움은 이 책이 독자에게 선사하는 수준 높은 분석적 논증과 비판적 해석학을 생각하면 거의 무시해도 무방할 것이다.

하선규(경주대 교수·사진영상디자인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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