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프리즘]조기숙/´3김 정치´ 못벗어나는가

  • 입력 2002년 4월 2일 18시 40분


M 논설위원께,

우리가 언론인과 애독자로 만나 정치이야기를 나눈 지도 일년이 넘었군요. 작년 5월 우리의 대화가 갑자기 생각난 이유는 시중에 떠도는 ‘노무현 현상’에 대해 저도 한마디 참견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때는 민주당으로서는‘이회창 대세론’에 맞설 유일한 대안은 3김의 지원을 받는 모 인사뿐이라고 어떤 스님이 ‘예언’했다는 소문이 비밀리에 돌고 있었지요. 저는 여론을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도사의 예측 같은 것은 믿을 수 없다며 ‘노무현을 주목하십시오. 폭발할 잠재력이 있습니다’라고 덧붙였지요. 당신께서는 민주당 간판으로 경상도에서 표를 얻기는 어려울 거라며 머리를 옆으로 흔드셨습니다.

▼대선후보들 지역주의 여전▼

저는 노무현 돌풍을 거품이라며 폄훼하는 설명에도, 지역적 기반 때문에 지속될 것이라는 해석에도 동의하지 않습니다. 제가 노무현의 폭발 가능성을 내다봤던 이유는 정당구도의 탄생과 성장, 소멸, 그리고 재탄생을 설명하는 정당재편성론에 근거한 것이지요.

정당구도는 균열적 쟁점에 기반해 편성됩니다. 하지만 기존 쟁점이 새로운 문제를 해결하는 데 더 이상 적실성을 갖지 못할 때 기존 정당으로부터 이탈하는 유권자의 수가 급증하고, 기권이 증가하게 되지요. 이때 새로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둘러싸고 정당 간 새로운 균열이 등장함에 따라 정당재편성이 일어납니다. 기존 정당에 대한 유권자들의 지지기반을 흔들어 새로운 다수당이 등장하기도 하지요.

1987년 민주화 이후 민주 대 반민주의 구도가 적실성을 상실하면서 지역구도로 정당이 재편성됐습니다. 하지만 지역정당은 현안을 해결하는 데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DJP연합의 실패가 증명했습니다. 지역정당으로부터의 이탈이 지속적으로 진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대안이 없었기에 유권자의 정치불신이 증가했던 것입니다. 그동안 정당해체가 광범위하게 진행돼 기존정당으로부터 이탈하는 유권자가 많고 선거유동성이 높아짐에 따라 이번 대선 결과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이 제가 오래 전부터 해왔던 주장입니다. 이 말은 역으로 이번 대선에서 정당재편성을 이룰 가능성이 많음을 시사합니다. 그리고 정당재편성이 일어나는 데 필요한 세 가지 조건을 충족시키는 사람이 바로 노 후보여서 ‘노무현 바람’이 등장했다는 것이 저의 해석입니다.

첫째, 정당재편성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정당이 차별적인 대안을 제시해야 합니다. 한나라당과 구분되는 노 후보의 뚜렷한 정체성이 정당재편성과 맞물려 대안으로 등장한 것 같습니다. 둘째, 국제통화기금(IMF)관리체제의 경제위기 이후 나타나기 시작한 이념투표가 이번 대선에서 본격화될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정당재편성은 이념적 균열에 따라 일어날 가능성이 높고 온건한 정동영 후보보다는 진보성향의 노 후보가 더 많은 지지를 받게 된 것이지요. 셋째, 본격적인 정당의 재편성은 기존의 지역균열을 가로질러야 성공할 수 있는데 영남출신인 노 후보가 기존의 지역균열에 큰 거부감을 주지 않고 편승하면서 한나라당의 지지기반을 가르는 데 가장 적합했던 것이지요. 영남에서 노무현의 지지를 또 다른 지역주의로만 해석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봅니다.

이렇게 본다면 기존의 지역정당 구도를 뛰어넘는 새로운 정치에 대한 열망이 바로 민주당 경선과정에서 나타난 노무현 바람의 핵심이라고 생각됩니다. 설사 음모론의 실체가 존재한다 하더라도, 이런 시대적 흐름이 없었다면, ‘음모’만으로 이러한 바람을 만들어내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정치개혁 청사진 제시를▼

그렇다고 노 후보에 대한 지지가 안정된 것이라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노 후보에 대한 지지가 또 다른 지역주의이거나 후보 개인에 대한 충성이라면 3김이 누렸던 지지와 같이 안정적이겠지요. 하지만 한 언론사의 여론조사 결과 노 후보에 대한 지지의 핵심은 수도권, 고학력의 30, 40대 중산층으로 가장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는 유권자라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이들은 언제든지 자신의 평가에 따라 선택을 수시로 바꿀 수 있는 유동적인 유권자입니다. 따라서 노 후보가 3김 정치와는 차별적인 정치개혁의 청사진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이들은 가차 없이 등을 돌리거나 기권을 택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보들이 앞을 다투어 김영삼 전 대통령을 만나려고 할 정도로 보스정치의 신화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번 대선에서는 지역주의나 3김에 의지하는 후보가 아니라, 가장 이성적인 유권자의 마음을 사는 후보가 승리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조기숙 이화여대 국제대학원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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