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포커스]남편이 낸 산불 22년간 변상 용간난 할머니

  • 입력 2001년 12월 27일 18시 19분


【하루가 멀다하고 터져나오는 갖가지 ‘게이트’…. 온나라에 진동한 ‘썩은 돈 냄새’….

다시 되돌아보고 싶지 않은 일이 너무 많았던 신사년 한해가 저물어가는 세모에 그래도 가뭄속 한줄기 싱그러운 단비처럼 많은 한국인들의 가슴에 위안으로 기억될 일이 있었다면 단연 가난한 한 할머니의 이야기가 아닐까.

17년전 세상을 뜬 남편 이두봉씨를 대신해 산불피해 변상금 123만 157원을 갚은 용간난(64)할머니. 지난 9월18일 변상금을 완납한 용 할머니는 “지난 20년 동안 가슴 한구석이 늘 빚 때문에 답답했는데 변상금을 모두 갚아 후련하다”며 “영감도 이제 저승에서 편히 쉴 수 있을 것”이라 말했다.

25일 찾은 강원도 홍천군 홍천읍 희망리 85-2, 용 할머니 집에서는 아주 작지만 소중하기 그지없는 ‘새 희망’ 일구기가 한창이었다. 할머니의 평생 ‘꿈’이었던 칼국수집을 차리기 위해 벽을 헐고 내부를 개조하는 공사가 벌어지고 있었던 것. 얼굴에 깊게 패인 주름과 거친 손은 간난의 세월을 말해주고 있었으나, 용 할머니의 목소리는 그렇게 밝을 수가 없었다.】

@@ “약속은 지켜야지….”

79년 3월16일, 홍천읍 삼마치고개 일대가 불길에 휩싸였다. 한시간 남짓 동안의 이 산불로 3.5㏊(약 1만600여평)에 들어찼던 스트로브 잣나무 9700여그루가 잿더미로 변했다. 2년전인 77년 조림된 나무들이었다. 불을 낸 이두봉씨는 5개월 징역에 변상금 123만157원을 부과받았다. 한약재를 캐러 갔다가 담뱃불을 제대로 끄지 않은 게 화근이었다.

공무원 초임이 10만원이 채 안 되던 시절, 120여만원은 남의 논에서 일하며 일당으로 근근이 살림을 꾸려나가던 이들 부부에게 엄청난 액수였다. 10만원 주고 산 손바닥만한 땅에 손수 14평 짜리 집을 지어 6식구의 거처를 마련한 게 바로 1년전. 할아버지는 석방된 뒤 다시 제재소 등에서 일용잡일을 하다가 이듬해 중풍으로 앓아 누웠고, 84년에 6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아내에게 “변상금을 내지 않으면 자식들이 대신 내야 하니 당신이 꼭 갚아달라”는 유언을 남긴 채….

남긴 재산이라고는 집한칸이 전부. “장례를 치르려는데 수중에 전날 일당으로 받은 7000원이 달랑 있더라구요. 장례도 이집 저집서 20만원을 융통해 치렀지요.”

고교 졸업반부터 초등학생까지 올망졸망한 4남매(3남1녀)의 학비에 생활비도 막막한데 빚까지 ‘물려받은’ 할머니는 눈앞이 캄캄했다. “몸 움직여 품파는 것말고 따로 돈나올 데가 없었어요. 그래도 약속은 지켜야지. 빚을 아이들에게 넘겨줘선 안되겠다는 생각도 했고….”

매일 새벽 네아이의 도시락 싸기부터 시작해 낮에는 남의 농사일을 해주고 저녁부터 새벽까지는 홍천시장통의 한식집 막국수집 칼국수집 분식집 등 야간식당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생활이 이어졌다. 일당이라야 고작 7000원. 그처럼절박한 삶을 이어가면서도 할머니는 매년 한두차례씩 3만∼10만원의 변상금을 꼬박꼬박 납부했다.

“낫질하며 졸다가 베일 뻔도 하고, 식당 배달일하며 졸며 걷다가 교통사고 날 뻔도 하고…. 정말 죽을 때까지 갚을 수나 있을까 아득했어요. 원망? 이왕 그리된 거 원망하면 뭐해. 그 양반 생전에 산불낸 것 가지고 얼마나 가슴아파했는데…. 내 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유언대로 빚을 다 갚아 저승길을 홀가분하게 해줘야겠다는 생각뿐이었지요.”

78년부터 이웃에 살아온 김길순 (金吉順·74)할머니는 할머니 부부가 할아버지 생전에 무척 의가 좋았다고 전한다. “나이차가 많잖우. 젊은 색시라고 참 이뻐했지. 살림 어려운 것 빼고는 오순도순 잘 살았어. 감옥에서 나와 풍맞고 누워있을 때 마누라가 첫새벽에 나가 밤늦게 돌아오니 밥을 제대로 챙겨줄 사람이 있나. 절뚝거리며 오면 내가 밥도 해주곤 했는데 얼마 뒤 앓아눕더니 그 길로 못 일어났어.”

김 할머니가 생전의 남편 얘기를 꺼내자 할머니의 눈시울이 이내 젖어들었다. 그렇게 어렵사리 키운 4남매는 올해 28세인 막내아들 빼고 모두 가정을 이뤄 손자 손녀도 6명이나 봤다. “자식들이 모두 착해 속 한번 안썩이고 커줬다”는 게 할머니의 큰 자랑이었다. 아들셋 중 둘이 대학을 나왔다는 게 더 큰 자랑임은 물론이고….

@@또다른 드라마의 산파

할머니의 사연은 사실 용 할머니의 가슴 속에서 끝날 일이었다. 묻힐 뻔한 이 사연을 발굴해낸 주인공은 이순욱(李順旭·41) 산림청 홍천국유림관리소 서무계장. 이계장과 용 할머니 사이엔 지난 20여년간 세 차례의 인연이 있었다. 81년 9급공무원으로 임용돼 홍천관리소 서무계에 배치된 그녀에게 연말경 웬 초로의 아낙이 찾아왔다. “변상금을 깎아달라는 것도, 못내겠다고 하소연하는 것도 아니고 조금씩 나눠 낼 수 있게 해달라고 하는 얘기였어요. 그때 100만원쯤 남아있었지요.”

여기저기 임지를 옮겨다니다 86년 서무계로 다시 돌아왔을 때는 70만원이 남아있었다. 지난해 12월, 이번에는 서무계장으로 부임한 그녀는 대장을 검토하다가 깜짝 놀랐다. “돌아가신 할아버지 이름으로 변상금 10만원이 남아 있더군요. 정말 놀랐어요. 20년 뒤까지도 돌아가신 분 명의의 변상금을 꾸준히 갚고 계실 줄이야….”

이 계장은 9월18일 마지막 10만원을 자신이 내고는 용 할머니를 찾아갔다. “산림청 직원만 보면 죄인처럼 미안해하며 어쩔줄 몰라하시던 할머니의 멍에를 풀어드리고 싶었어요. 그간 고생 많았다고 인사드렸지요.” 그 얼마 뒤 추석에는 딴데 불우이웃돕기할 게 아니라 할머니를 돕자며 사무실 직원들끼리 20만원을 모아 전달했다. “할아버지가 집을 남겼으니 채무의무는 있는 상태였지만 할머니가 그 변상금을 갚지 않는다고 어쩌겠어요. 다른 사람들은 주소지 옮기고 잠적해버리는 경우도 많아요.”

‘20년 전과 비교해 할머니가 많이 늙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이계장의 답이 의외였다. “요즘은 마음이 편해지셨는지 되레 젊어보여요. 한창 아이들 키우며 고생하던 시절에는 40대 인데도 할머니같았어요. 그때나 지금이나 ‘몸뻬’에 푸른 플라스틱 슬리퍼차림인 게 안타까워 얼마전 할머니 생신에 신발 하나 사드렸지요.”

@@미담은 또다른 미담을 낳고...

용 할머니의 얘기가 세상에 알려진 건 지난 9월말 한 지방신문이 보도하면서부터였다. 그때부터 여기저기서 뜨거운 반응이 이어졌다. 11월15일에는 산림청 직원들이 십시일반으로 모은 위로금 130만원을 전달했다. 할머니가 완납한 변상금과 같은 액수다. “법을 잘 지키지 않는 요즈음 생계유지조차 어려운 환경 속에서 할머니가 보여준 준법정신과 책임의식은 전 국민에게 큰 감동을 줄 만큼 아름다운 일”(신순우·申洵雨· 산림청장)이라거나 “아름다운 얘기에 감동했으며 할머니를 본받아 정직하게 살아가겠다”는 격려편지들이 쇄도했고, 작은 성금들도 모여들었다.

지난달 26일에는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이 격려서신(“작은 일 같지만 참으로 감동을 주는 일이다. 다른 사람에게는 적은 돈일지 몰라도 네 자녀를 홀로 키워야 하는 처지에서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으로 생각한다.”)을 보내왔다.

미담은 꼬리를 물었다. 경북 포항 효자초등학교 김흥섭 교장(60)의 경우도 눈에 띄는 사연. 김교장은 20년전 대구 삼덕초등학교 6학년8반 담임 시절 제자들과 문집을 발간하고 남은 공금 6872원이 통장 속에서 불어난돈 10만6800원을 소액환으로 바꿔 보내왔다. “제자들과 연락이 끊겨 허락을 받지는 못했지만 제자들도 용 할머니에게 보낸다면 찬성할 것”이란 설명이 덧붙여져 있었다.

@@새로운 희망찾기

이처럼 따뜻한 격려가 이어지자 용 할머니는 평생 꿈이던 칼국수집을 차릴 용기를 냈다. 칠순을 바라보도록 남의 집 일만 하던 할머니가 처음 ‘내 가게’를 갖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이 제가 김치도 맛있게 담그고 국수도 맛있게 만든다고 해요. 장사가 잘 됐으면 좋겠는데…. 객지에서 직장다니는 우리 막내 장가도 보내야지.”

할머니 집에 벌어진 공사판은 근처에 사는 둘째아들 이운정씨(李雲定·34)가 돌보고 있다. 간판 일을 하는 이씨가 동료들과 시간날 때 와서 자갈 나르고 시멘트 개어 바르고 하는 식이다. 가장 힘든 일은 모두 도맡아 하던 그는 “부모님의 사연은 커서야 알게 됐지만 어머니가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용 할머니는 혼자힘으로 20여년 간 4남매를 키워낸 이 집을 평생 떠나지 않을 생각이다. “죽을 때까지 여기서 살 생각이요. 명의는 아들 것으로 했지만 내가 살아있을 때까진 팔지 말라 했지.”

인터뷰 내내 ‘단한번의 실수’가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인생에 드리운 주름이 너무나 깊었던 게 아닐까하는 안쓰러움을 지울 수 없었다. 할아버지는 악몽과 죄책감에 시달렸고 할머니는 신산(辛酸)의 삶을 대가로 지불했다. 문득 국가에 환수해야 할 돈을 내지 않고 버티는 두 전직 대통령의 얼굴이 떠올랐다. 국가와 민족을 내세우며 자신의 이익만을 좇는 정치인들과 탈세를 밥먹듯하는 기업가들의 얼굴도 함께…. 또 세금낼 돈은 없다면서도 호화판 해외여행을 밥먹듯하는 사람들 뉴스도 새삼 귓전을 맴돌았다.

할머니에게 물었다. 억울하지 않으시냐고…. “아, 없으니까 못 갚겠지…. 나보다 못한 사람들도 있구나하고 생각하면 되지 뭘….”

할머니는 집에서 10분 거리인 할아버지 산소를 가끔 찾아 “영감, 이제 편히 쉬슈. 그 웬수 다 갚았수”라고 말을 걸어본단다. 22년전 할아버지의 실수로 불에 탓던 삼마치 일대에는 화재 직후 다시 조림된 스트로브 잣나무가 어느덧 어른키의 서너배 높이로 자라났다.새해를 맞는 희망리는 그렇게 ‘새 희망’을 키워가 있었다.

<만난사람〓서영아기자>sy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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