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보기자의 반집&한집]절레절레…쯧쯧…유창혁 "미치겠네"

  • 입력 2001년 10월 28일 18시 44분


유창혁 9단의 한숨소리가 높아만 간다.

한숨 한번 쉬고 혀를 쯧쯧 차고 고개를 살레살레 젓다가 얼굴을 찌푸린 채 반상을 들여다 본다. 곁에서 보는 사람이 ‘저렇게 고민하다간 제명에 못 죽을 것 같다’고 느낄 정도.

22일 열린 국수전 승자 1회전. 가장 강력한 도전 후보인 유 9단(백)과 이창호 9단이 일찌감치 맞붙었다.

유 9단의 한숨소리 만큼 바둑 형세는 이미 기울어져 있었다. 막강 끝내기 이 9단을 염두에 둔다면 역전은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더우기 바둑 형태가 그렇다. 형세의 차이가 커도 어디선가 실낱같은 희망을 걸 수 있는 바둑이 있는가 하면 차이가 매우 미세해도 전혀 뒤집을 곳이 없는 바둑이 있다. 게다가 이 바둑은 차이도 제법 난데다 형태도 단순해 역전이 어려워 보였다.

유 9단도 그걸 잘 알텐데 왜 끈질기게 바둑을 두고 있는 것일까. ‘차라리 던져버리는게 나을 텐데…’하고 생각하는 순간 유 9단이 중앙에서 패를 걸어 간다. 물러서지 않고 혹시 역전할 길이 있는 걸까. 그러나 이 9단은 즉각 패의 크기를 더 키우며 강력하게 맞받아친다.

무의식중에 유 9단의 입에서 “미치겠네”라는 탄식이 흘러나온다.

물론 유 9단에겐 팻감이 하나도 없다. 약 6분여간 물끄러미 반상을 훑어보던 유 9단은 따낸 바둑돌을 들어 판 위에 얌전하게 올려놓는다. 졌다는 표시. 두 사람은 복기 할 것처럼 몇마디 주고 받았지만 이내 바둑돌을 주섬주섬 바둑통에 담고는 벌떡 일어선다.

초반부터 승부가 갈려 복기하기엔 너무 싱거운 모양이다.

그러나 오만상을 짓던 유 9단은 돌을 던진 뒤 옆 검토실로 건너가 다른 기사들과 홀가분해진 표정으로 웃는다. 마치 언제 내가 한숨을 짓고 지옥 속을 헤맸냐는 듯.

장면도. 검토실에선 초반에 승부가 났다며 일찌감치 검토를 끝낸 상태. 국후 이 9단과 루이나이웨이 장주주 9단 부부가 머리를 맞대고 검토를 시작했다.

초반부터 형세가 기울었다는 검토실 얘기와는 달리 장면도까지는 만만치 않았다는 게 이 9단의 분석. 백이 흑 ○ 석점을 어떻게 공격해 이득을 얻어내느냐가 국면의 포인트다.

유 9단의 선택은 백 1. 검토실에선 아무도 나무라지 않은 수였지만 이 9단은 ‘대악수’라고 지적했다.

흑 2가 안성맞춤이어서 이 석점이 너무 쉽게 타개됐을 뿐 아니라 중앙으로의 진출로까지 뚫려 있다는 것. 이 수로 어디를 둬야했을까. 이 9단은 ‘가’의 곳을 가만히 가리켰다. 한줄 차이지만 이 수로 형세를 비슷하게 유지할 수 있다는 것. 이 수가 세계최강 이 9단의 혜안을 보여준 수였다.

suhcho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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