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보기자의 반집&한집]조훈현-최명훈 후지쓰배 결승

  • 입력 2001년 8월 5일 18시 45분


최명훈 8단
최명훈 8단
점심시간. 아무도 없는 대국실에 최명훈 8단이 홀연 나타났다. 오후 대국이 시작되려면 아직도 20분 가량 남았지만 편히 앉아 쉴 수 없었던 탓일까.

그는 우선 자기 자리에 앉아 판을 한번 훑어보더니 벌떡 일어나 상대편 쪽으로 자리를 옮겨 바둑판을 다시 뚫어져라 쳐다봤다. 상대의 시각에서 형세를 보는 것이다.

4일 도쿄 일본기원에서 열린 제14회 후지쓰배 결승전. 우승 상금 2억여 원이 걸린 단판 승부다. 상대인 조훈현 9단은 이미 이 대회에서 두 번 우승한 적이 있지만 최 8단으로선 첫 세계대회 결승 진출이다. 평소 활달한 성격으로 어느 자리에서나 분위기를 이끄는 최 8단이지만 이번 결승을 앞두고는 확실히 긴장하고 있었다.

숙소인 도쿄돔 호텔에서는 위층에 투숙한 아이들이 뛰어다니는 바람에 잠을 잘 수 없다며 방을 옮겼다. 대국 당일 아침 식사도 걸렀다. 대국장으로 향하는 택시 안에서도, 대국장에 도착해서도 굳은 얼굴로 골똘히 생각하는 모습이었다. 원래 백면서생처럼 하얀 얼굴이 더욱 허옇게 보였다.

오전 10시. 그는 흑을 잡게 됐다. 일본 기전의 덤은 국내 기전의 6집반보다 적은 5집반으로 흑에게 유리하다.

초반 포석은 매우 신중하게 진행됐다. 형세는 팽팽한 균형을 이룬 채 흘러가고 있었다. 그러나 한순간 백의 승부수가 터졌다.

백 4의 침입이 최 8단의 머리 속에는 전혀 없던 수. 최 8단은 이 수를 보는 순간 ‘아차’ 싶었다고 했다. 그는 국 후 흑 1, 3이 느슨한 수였다고 후회했다. 흑 1로는 백 2 자리에 두어 실리를 확보해야 했으며, 흑 3으론 평범하게 한 칸 뛰지 말고 우상변 백을 좀더 압박해 백 4로 뛰어들 기회를 주지 말았어야 했다는 것.

흑은 5의 마늘모로 백 한 점을 잡자고 했지만 백 6으로 부딪친 수가 좋았다. 검토실에선 백 ‘가’를 예상하고 어떻게 변화해도 백에게 좋지 않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었지만 모양을 돌보지 않고 부딪쳐간 무식한(?) 백 6을 보고는 ‘좋은 수’라며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이후 백이 흑진 속에서 다섯집이나 내고 살아버렸다. 흑집이 10집 이상 날 곳에 별다른 대가없이 백이 살아버리자 갑자기 형세가 크게 기울었다.

바둑이 끝난 뒤 최 8단은 오히려 담담해져 있었다.

그는 “오늘 바둑은 완패였어요. 아쉽지만 어쩔 수 없죠. 다음 기회를 봐야죠”라고 말했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대국실에 혼자 들어가 이날 바둑을 복기하기 시작했다.

<도쿄〓서정보기자>suhcho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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