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프리즘]서병훈/‘온건파’에게 박수를

  • 입력 2001년 7월 24일 18시 37분


시절이 수상하다 보니 별 것도 아닌 일에 감동을 받곤 한다. 사람이 좀스러워진 것 아니냐는 말도 들음직하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야당의 정책위의장이 정부가 발표한 중산층 대책에 대해 ‘참 좋은 내용’이라고 칭찬을 보냈다. 이것을 요즘 정부와 ‘결사항쟁’ 중인 어느 신문이 눈에 잘 띄게 보도했다. 우연이겠지만, 그 다음날에는 정부의 ‘홍위병’ 역할을 한다고 눈총 받는 신문이 여당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보냈다.

언론이라면, 적어도 불편부당(不偏不黨)한 공기(公器)임을 자처하는 신문이라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 그런데도 독자 눈에는 이런 것조차 새로워 보인다. 그만큼 세상이 혼돈스러운 것이다.

이 와중에 여권의 한 ‘실세’가 언론사 세무조사 정국을 풀어갈 ‘온건한 해법’을 제시, 눈길을 끌고 있다. 자세한 내막이야 모르겠지만, 정부 여당의 일반적인 정서를 거스르는 말을 한 모양이다. 그랬더니 역시 여권 안에서 역풍이 거세다. 온갖 비난이 드높다.

자신이 속한 집단의 주류를 거슬러가며 독자적인 의견을 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한 조직이 건강한 정신상태를 유지하자면, 이런 소수의견을 함부로 무시해서는 안 된다. 그 소수가 온건론을 펼 경우에는 특히 그러하다. 일촉즉발의 전운이 자욱할 때는 강경파가 득세를 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일이 되게 만드는 것은 대개가 온건파이다. 이 점은 역사가 증명하는 바이다.

19세기 말 유럽의 사회주의자들은 혁명의 성공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Eduard Bernstein)의 생각은 달랐다. ‘중산층이 탄탄하게 자리를 굳히면서 자본주의는 상당 기간 안정을 누릴 것이다. 따라서 혁명적인 변화보다는 점진적인 개혁을 통해 미래를 대비해야 한다.’ 이런 베른슈타인의 주장에 대해 강경 사회주의자들은 ‘수정주의’라고 모욕적인 낙인을 찍었다. 그러나 역사는 온건파 베른슈타인의 손을 들어주었다.

1970년 칠레의 사회주의자 아옌데(Allende)는 선거를 통해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40%도 안되는 국민의 지지로 정권을 잡았다. 소수파 대통령 아옌데는 무엇보다 집권층 내부의 강온 대결 때문에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온건 좌파는 힘이 약하니 합법적 개혁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반면 강경 좌파는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극한 투쟁을 해야 한다고 강변했다. 결국 강경파가 주도권을 잡았다. 그러자 야당 쪽에서도 강경파가 일어섰다. 강-강의 맞대결은 쿠데타라는 비극으로 끝나고 말았다.

대체적으로 강경파의 논리는 명쾌하기 이를 데 없다. 군더더기가 없이 직선적으로 결론에 도달한다. 그러니 시원하다. 그러나 한 발자국만 뒤로 물러서면 볼 수 있는 것을 놓치는 경우가 많다. 사회에서 쟁점이 되는 사안들은 거의가 복합적인 성격을 띤 것들이다. 햇볕정책이 그렇고, 의료개혁이 그렇고, 최근의 언론사 세무조사도 그렇다. 그런데도 강경파들은 쾌도난마(快刀亂麻)를 멈추지 않는다. 무식하니까 용감하다는 말이 우스갯소리만은 아닌 것이다.

영국의 사상가 존 스튜어트 밀은 딱한 사람이었다. 19세기를 대표하는 지성치고는 너무나 ‘우유부단’했다. 그는 어떤 주장이든 100% 틀린 것은 없고, 따라서 아무리 반대파의 주장이라고 하더라도 새겨들어야 할 말이 한두 가지는 있는 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딱 부러진 결론을 내리려 하지 않았다. 대신 여기 저기 타당한 말을 모아 절충하는 형식을 취하고자 했다. 자연히 급진적인 모험보다는 온건 합리적인 개혁에 희망을 걸 수밖에 없었다. 같은 시대를 살았던 카를 마르크스는 그를 ‘잡탕’이라고 조소했다. 그러나 이것은 양식 있는 지식인이라면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역사 앞에 책임을 지자면 단순논리로는 안되는 것이다.

이쪽에서 강경파가 목소리를 높이면 저쪽에서도 덩달아 강경파가 힘을 얻게 된다. 양쪽의 과격파가 맞불을 놓게 되면 비극적 결말은 피할 도리가 없다. 반면 온건파와 온건파가 마주보고 대화하면 세상이 평안해진다.

이들이 주도권을 잡아 문제를 풀어나가도록 도와주자. 우리가 강경파들의 노리개도, 설익은 급진주의자들의 실험 대상도 아니지 않은가.

서병훈(숭실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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