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프리즘]서병훈/'노블레스 오블리제'

  • 입력 2001년 5월 22일 18시 44분


사도(使徒) 바울이 누구인가. 그는 철학으로나 율법으로나 세상에서 부러울 것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원래 이름도 ‘세상에서 가장 높은 자’라는 뜻의 사울이었다. 그러나 예수를 만난 뒤 이름을 바울로 바꿔 버렸다. 바울은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라는 뜻이다.

뉴턴은 누구인가. 그는 고전 물리학의 토대를 세우면서 현대 물리학의 앞길을 예비한 사람이었다. 그런 뉴턴이 기가 막힌 이야기를 했다. 내가 남보다 조금이라도 멀리 볼 수 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선대(先代) 과학자들의 어깨를 딛고 올라서서 바라볼 수 있었던 덕분이었다고.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그가 존경스럽지 않은가.

자신을 진정 낮출 수 있는 자만이 높이 올라갈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일수록 사회로부터 진 빚에 대해 남다른 책임감을 느낀다.

▼지위 높을수록 책임 커지건만▼

사람을 일컬어 왜 ‘사회적 동물’이라고 부르는가. 그것은 사회 속에서 주위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야 인간답게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제 아무리 잘난 사람도 따지고 보면 그 ‘성공의 8할’은 사회로부터 기인한 것이다.

성공한 자, 출세한 자, 이른바 사회 지도층이라는 사람들이 겸손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들이 누리는 영화가 자신들의 재능과 노력의 결실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엄청난 착각이요 오만이요 독선이다.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이곳저곳의 수많은 사람들의 도움에 힘입어 오늘 이 정도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다른 누구보다도 더 겸손해야 한다. 사회에 대해 깊은 책임을 통감해야 마땅하다.

우리 사회에서 최근 들어 노블레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라는 화두(話頭)가 유행하고 있다. 지위나 명성이 높으면 높을수록 그에 걸맞은 행동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는 뜻의 이 말이 새삼스럽게 입에서 입으로 번져나가고 있는 것이다. 이런 현실이 우리를 슬프게 만든다.

품격이 살아 있는 사회에서는 지도층부터 다르다. 아니, 지도층이 제대로 서야 나라도 바로 선다. 노블레스 오블리제를 실천하는 사람들은 오늘의 자신을 만들어 준 사회에 대해 진심으로 고마워한다. 그리고 사회의 발전을 위해 헌신하고자 한다. 그래야 자신들의 입지도 탄탄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서구의 보수주의가 지도층의 솔선수범과 엄격한 자기관리에 그 터전을 두고 있는 것도 우연이 아닌 것이다.

불행하게도 한국 사회는 그렇지 못하다. 아니, 거꾸로 가고 있다.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일수록 사회에 대한 보은(報恩) 의식이 희박하다. 모두가 저 잘난 맛에 살고 있다. 한국의 보수주의에서 썩은 냄새가 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정치인들이야 처음부터 논외니 기대도 하지 않는다고 치자. 적어도 우리 사회의 정신적 지주 노릇을 담당해야 할 인사들은 무엇인가 달라야 한다. 이를테면 학문을 가르치는 대학의 총장이나, 영혼의 구제를 담당하는 종교계의 지도자라면 사회적 책임감에 밤잠을 설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도리이다.

그러나 몸으로 부딪쳐 보고 들리는 소문을 종합해 보건대, 우리의 현실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 겉으로는 지성과 양심을 녹음기 틀 듯 되풀이하지만, 실제로는 시정잡배보다 못한 탐욕과 권력 논리에 갇혀 세상을 휘젓는 경우가 적지 않다. 제왕처럼 군림하며 민주주의를 우롱하는 사람들이 태반이다. 속 다르고 겉 다른 행태를 아무 부끄러움 없이 반복한다. 그러니 세상이 온통 냉소주의로 가득 차는 것이다. ‘웃기고 있네’라는 비웃음이 넘쳐나는 곳에서 희망이 있을 수가 없다.

▼껍데기 지도층 너무도 많아▼

물론 남이 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제 몫을 다하는 훌륭한 지도층 인사들도 없지 않다. 그런 분들의 노력 때문에 우리 사회가 이 정도로나마 발전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는 그런 분들의 빛을 가리는 껍데기 지도층이 너무도 많다.

명성과 지위에 걸맞지 않게 처신하는 사람들의 실상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그들이 과도한 명예와 부당한 권력을 누리지 못하도록 견제를 해야 한다. 그런 사람들을 위해 우리의 어깨를 내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아, 셰익스피어가 말했던가, 백합이 썩으면 잡초 썩는 것보다 오히려 더 고약한 냄새가 난다고.

서병훈(숭실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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