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프리즘]서병훈/"인기에 연연하지 않겠다"

  • 입력 2001년 5월 1일 18시 35분


‘민심을 겸허하게 수용하겠다.’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집권층 사람들이 되풀이하는 말이다. 자신들의 잘못을 반성하겠다니 듣기 싫지는 않은데, 그러면서 덧붙이는 말이 걸린다. 어떤 경우에도 인기에 연연하지 않고 의연하게 대처하겠다. 남이야 뭐라고 하든 내 갈 길을 가겠다는 ‘선전포고’라면, 이러고서 어떻게 민심을 수용하겠다는 것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적어도 민주주의를 부정하지 않겠다면, 인기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말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 같은 말도 누가 어떤 상황에서 하는지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를 갖게 되기 때문이다. 인기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발상이 자칫하면 민주주의의 근본을 뒤흔들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민심 따르겠다 하면서도…▼

집권당이 내년 말 대선에 명운을 걸 수밖에 없음은 자명한 일이다. 국민의 인기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것이 권력을 내놓을 각오도 불사한다는 말은 분명 아닐 것이다. 나름대로는 정권 재창출이 가능하다는 계산을 하고 있음이 분명할 터, 그 속내가 참으로 궁금하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민심을 잃고도 선거에서 이길 방법이 있다는 것은 금시초문이기 때문이다.

국민의 정부가 추진하는 개혁정책에 힘을 실어주지 못하는 국민에 대한 원망 때문에 인기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말을 할 가능성도 있다. 이것은 두 가지 사실, 즉 이 정부가 하는 일이 옳다는 도덕적 자기 확신과 언젠가는 국민이 진심을 알아주리라는 낙관적 기대를 전제하고 있다.

하기야 인기에 연연하지 않았던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장기간 권력을 잡았던 사람도 없지 않다. 2500여년 전, 페리클레스는 그리스의 한 작은 도시국가 아테네를 외침의 위기에서 구하며 전무후무한 전성시대를 일궈냈다. 그는 여러 점에서 우리의 흥미를 끈다.

우선 그는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감탄의 대상이 되는 아테네 민주주의의 꽃을 활짝 피운 주인공이다. 그는 민주주의라는 말을 최초로 사용한 인물로 기록되고 있다. ‘민주주의란 다수에게 이익이 되도록 하는 정치’라고 규정한 그의 한 마디는 모든 민주주의 이론의 출발점이 되고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자면 페리클레스는 여러 면에서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그는 출신부터 귀족에다 부자였다. ‘가난한 다수’가 움직이는 민주주의와는 이질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자신의 뜻을 관철하기 위해서는 민심을 거역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걸핏하면 국민을 윽박질렀다. 번지르르한 인기 공약보다는 고통 분담을 요구할 때가 더 많았다. ‘민주정치를 움직이는 사람이 반드시 민주주의자일 필요는 없다’는 말이 그로 인해 생겨났을 정도였다.

우리 집권층 주변 사람들로서는 혹시 페리클레스의 성공담이 부러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함부로 페리클레스 흉내를 내서는 안된다.

무엇보다 그는 국민에게 ‘피와 땀과 눈물’을 요구할 자격이 충분히 있었음을 알아야 한다. 나라를 도탄의 위기에서 구할 능력과 비전이 있었다. 도덕적으로도 흠이 없었다.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그가 국민의 절대적인 지지를 확보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당시 아테네의 최고 정치 지도자들은 1년에 한번씩 시민들의 직접 선거에 의해 선출되었다. 매년 재신임을 받아야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부정을 저지르거나 민의를 배반하면 언제든지 외국으로 추방될 처지였다. 페리클레스는 이런 정치판에서 30년이나 계속해서, 그것도 국민을 당당하게 야단치며 최고 지도자 노릇을 했다. 국민이 자신의 진심과 헌신을 믿어준다는 자신이 있으니 인기에 연연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민주주의 포기 최후통첩인가▼

연합 여권 소속 의원들이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국무총리 해임안을 무산시켰다. 민심은 고사하고 자신들의 연합 소속 국회의원들 마음조차 다잡지 못하는 집권층이다. 나라를 경영해나갈 수완에 대한 믿음도 심어주지 못하고 있다. 그러면서 인기에 연연하지 않겠다니 한편으로는 공염불이요, 다른 한편으로는 민주주의를 하지 않겠다는 최후통첩이나 다를 바 없다.

인기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말,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서병훈(숭실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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