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GO사람들]월간 '함께 사는 길' 최승호 주간

  • 입력 2001년 1월 15일 17시 40분


전국에 폭설이 몰아친 요즘 주변에서 '대설주의보'란 말을 흔히 듣는다.

각지에서 적설량 기록이 경신되던 지난 주, 이 울림 좋은 단어를 입속에서 오물거리던 사람에게 다음과 같은 시가 떠올랐을지도 모르겠다.

길 잃고 굶주리는 산짐승들 있을 듯/눈더미의 무게로 소나무 가지들이 부러질 듯/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 때죽나무와 때 끓이는 외딴집 굴뚝에/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산과 골짜기에/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

최승호의 시 '대설주의보' 중 마지막 연이다. 폭설을 계엄령에 빗대어 독재시대의 암울한 현실을 드러낸 이 시 한 편으로 최승호씨는 한국의 가장 뛰어난 시인의 반열에 올랐다.

김수영문학상, 오늘의 작가상, 대산문학상 등 최고의 문학상을 받은 시인 최승호. 그러나 최시인을 환경운동연합이 발행하는 월간지 '함께 사는 길'의 편집주간으로 봐주는 사람은 많지 않을 듯하다.

최승호씨 자신조차도 자신을 '운동가'라기보다는 '어쩌다 이 길을 걷게 된 사람'이라고 평가한다. 그건 궁금한 일이었다. 왜 한국의 가장 뛰어난 시인중 한 사람이 환경운동을 하게 됐을까?

"대설주의보를 쓸 때 사북에서 초등학교 선생을 하고 있었지요. 사북이란 곳은 묘했어요. 한마디로 '잿더미'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문명이란 병들고 죽어가는 것이란 걸 배웠죠. 그게 생태에 관심을 가지게 된 뿌리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최승호 시인은 대한민국에서 '생태시'(환경문제를 다룬 시)에 근접한 시를 쓰는 몇 안 되는 작가에 속한다. 재작년에 발표돼 대산문학상을 받기도 했던 시집 '그로테스크'를 통해, 최시인은 쓰레기가 돼버리다시피 한 도시문명을 구역질 나는 언어로 비판했고, 동강주변에서 사라져가는 동식물의 이름을 나열한 실험시 '이것은 죽음의 목록이 아니다'로 환경문제에 정면으로 도전하기도 했다.

최시인은 계속 생태시라는 영역을 개척해 나갈까? 이 질문에 최시인은 부정적이었다.

"시는 다양해야 한다고 봐요. 제가 추구하는 것은 지독한 세계인식입니다. 생태란 그중 한 부분일 뿐이죠."

시 얘기를 할 때 최시인은 진지하다. 그러나 막상 오늘의 주제인 NGO단체의 활동가로서 최시인은 부끄러운 게 많은 시민에 속한다.

"사실 환경운동연합에서 일하는 동안 배운 게 많아요. 친환경적인 삶을 산다는 게 쉽지 않더군요. 편함을 거부하고 자신을 괴롭혀야 하거든요. 물 아껴쓰기는 하고 있지만..."

그러나 그런 솔직함이 시로 빛날 때의 날카로움을 독자들은 기억하고 있다. 최시인은 자신이 운동의 한가운데 서 있다고 보진 않지만, 운동을 보조하는 역할은 하고 있다고 믿는다.

"사실 모든 운동에는 교조적인 면이 있어요. '함께 사는 길'이란 잡지와 시를 통해 저는 사진과 언어로 운동에 호소하죠. 그런 작업이 운동의 교조적인 면을 순화시키는 것 같습니다."

벌써 2시 30분. '함께 사는 길'의 편집회의가 2시라고 했으니까 약속시간에서 30분을 넘겨버렸다. 사무실로 돌아가는 최시인에게 한마디만 더 묻기로 했다.

"선생님, 이 기사 제 마음 가는 대로 써도 돼죠?"

"그렇게 해요... 그렇게 해야 되는 거 아닌가…?"

안병률/동아닷컴기자 mokd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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