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24시]시인 최영미씨가 본 '시민의 발'

입력 2001-01-09 19:15수정 2009-09-21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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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은 나만의 방에서 빠져나와 다른 인생들을 만나는 광장이자 시장이죠.”

파격적인 시어(詩語)와 생동감 넘치는 비유로 90년대 한국 시단(詩壇)에 돌풍을 일으켰던 시인 최영미(崔泳美·40)씨에게 지하철은 하나의 ‘광장’이다. 하루에도 수백만의 인생이 이 광장에서 말없이 만나고, 부닥치고, 스쳐지나간다.

그가 말하는 광장이란 어떤 것일까. 색깔로 치면 잿빛이다. 생명력 넘치는 신록의 밝음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나는 사람들을 만난다/5초마다 세계가 열렸다 닫히는 인생들을/우르르 온몸으로 부딪혀 만난다.’(연작시 ‘지하철에서 6’의 전문)

그는 94년 첫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그의 ‘지하철 광장’엔 ‘여유’라는 공간이 없다. 5초 안에 열린 문을 통과하지 못하면 ‘낙오자’가 되므로.

시계가 없던 시절엔 오히려 여유가 있었다. 그런데 왜 1만분의 1초까지 잴 수 있는 지금 현대인에겐 여유가 더 없어졌을까. 5초만에 열렸다 닫히는 전동차에 몸을 싣기 위해 악을 쓰는 샐러리맨들의 등뒤에서 그는 ‘음험한 자본주의의 냄새’를 맡는다.

그래서일까. 치열했던 80년대 등하교 때마다 이용하던 신림역에서 그는 알 수 없는 충동을 느낀다. ‘내리실 문은 오른쪽’이라는 안내방송이 나오지만 그는 계속 왼쪽으로만 내리고 싶다.

이른 아침 1, 3, 5호선이 만나는 종로3가역의 나들목. 모두가 분주하다.

‘나는 보았다/밥벌레들이 순대 속으로 기어들어가는 것을.’(‘지하철에서 1’의 전문)

그가 지하철에서 길어 올린 구체적인 이미지는 뜻밖에도 ‘밥벌레’다. “지하철을 탈 때마다 내가 밥벌레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특히 출퇴근길에 그렇게 보이더라고요.”

순간적으로 느낀 것일까. 아니다. 그는 무위도식하는 ‘식충이’가 아니라 밥을 찾아, 일을 찾아 열심히 기어가는 벌레라고 얘기한다.

그에게 물었다. “지하철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지하철? 필요악이죠.” 뜻밖에도 선선히 대답한다. 그는 생래적으로 지하를 싫어한다. 지하층에 살기 싫어하는 것은 물론이고 다방도 지하엔 들어가 본 적이 없단다. 땅 속으로 다니는 지하철은 더더욱 싫다. 게다가 전동차 안은 시장판 같으니.

“이 물건으로 말할 것 같으면…”이 끝나면 “나같은 죄인 살리신…”이 뒤따른다. 어떤 사람은 머리만 보이고 어떤 사람은 등만, 어떤 사람은 펼쳐든 신문지 위로 손가락만 보인다. 그러나 그는 일주일에 서너번은 꼭 지하철을 탄다. 일산의 자택에서 서울로 나오기 위해서는 지하철이 가장 정확하다. 타고 싶진 않지만 ‘피할 수 없는 문명의 이기(利器)’!

오늘도 스스로 ‘밥벌레’가 되어 땅밑세상으로 들어서는 그녀에게만 지하철이 필요악일까.

<하종대기자>orionh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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