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현의 우리거리읽기15]덕수궁 돌담길

  • 입력 1999년 4월 26일 19시 32분


기쁨과 영광으로만 가득한 전기(傳記)가 어디 있으랴. 비탄과 고통으로만 가득한 왕조의 역사는 어디 있으랴. 조선 왕조에도 분명 영고성쇠(榮枯盛衰)는 있었다. 옥좌에 높이 앉은 왕의 모습도 있었고, 옥좌에 앉은 적장 앞에 무릎을 꿇은 왕의 모습도 있었다. 그러나 덕수궁(德壽宮)이 바라본 왕조의 모습은 어두운 그늘 속에만 묻혀 있었다.

압록강변까지 ‘작전상 후퇴’를 했던 선조 임금이 돌아왔을 때 임금님의 몸을 누일 궁궐 하나 서울에는 남아있지 않았다. 서둘러 찾아낸 집은 월산대군의 사저(私邸). 실록(實錄)도 되지 못하고 일기(日記)로만 남은 역사의 주인공, 광해군도 이 곳에 머물렀다. 경운궁(慶運宮)이라는 이름의 행궁은 그렇게 역사의 구석에 자리잡았다.

왕이 왕궁을 떠나는 사건은 후대에 다시 벌어졌다. 이번 목적지는 의주가 아니고 러시아 공사관이었다. 1년하고도 아흐레만에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문을 나섰다. 그러나 어차(御車)는 경복궁이 아닌 경운궁으로 향했다. 경운궁은 언덕 위의 러시아 공사관이 내려다 보이는 곳. 열강의 공사관이 둘러싸고 있는 곳. 고종은 국모(國母)를 찌른 칼날보다 더 흰 이를 드러낸 표범과 하이에나들의 주위를 택했다. 지도에도 등장하지 않던 초라한 행궁으로 옮겨갔던 고종의 고뇌는 어떤 것이었을까. 명함 속의 황제, 간판 속의 제국은 쓸쓸히 저물어갔다.

을사조약의 도장은 경운궁의 중명전(重明殿)에서 찍혔다. 덕수궁(德壽宮)으로 이름이 바뀐 궁은 왕위를 물린 태황제(太皇帝)의 임종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 모습으로 역사 속의 박제가 되었다.

덕수궁 돌담 옆의 해자(垓字)는 메워졌다. 박제가 된 고궁의 담을 옮기기는 쉬웠고 넓혀진 길로는 경성부청과 법원을 오가는 자동차가 분주해졌다. 덕수궁길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세월은 공평하여 역사의 주연도 조연도 모두 데리고 안개처럼 사라졌다. 개가를 울리던 러시아 공사관도 한국전쟁의 포연 속에 탑만 남긴 채 사라졌다. 낙엽이 차곡차곡 쌓이고 흩어지는 동안 은퇴한 덕수궁길도 차분히 나이를 먹었다. 덕수궁 돌담길은 70년대형 데이트의 대명사가 되었다. 1998년에 이 길이 단장을 했다. 무심한 아스팔트 포장을 걷어냈다. 걷고 싶은 길을 만들겠다는 의지가 뚜렷하게 드러났다.

이 길은 사람과 자동차가 어깨동무 할 수 있는 방법을 이야기한다. 차로는 뱀의 등처럼 구불구불하다. 자동차는 속도를 줄여 지나가라고 이야기한다. 서울시청 별관의 벽도 없앴다. 차도와 보도의 재료구분은 있지만 단차이가 없으니 거리는 시원스럽고 널찍해 보인다. 그러나 자동차가 보도로 넘어갈 수는 없다. 가로수와 돌말뚝이 곳곳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가로수들은 철 따라 다른 색으로 거리를 칠한다. 밤이 되면 돌담을 비추는 바닥의 조명과 분수대의 조명도 모습을 드러낸다. 걸음걸음 밝혀진 불빛을 사뿐히 즈려 밟으며 가자.

이 길의 모퉁이에는 ‘덕수궁길 보행자중심 녹화거리 조성공사’라는 이름의 동판이 있다. ‘서울특별시 공원녹지 확충 5개년 계획에 따라 옛 정취가 남아있는 덕수궁길을 걷는 이들에게 돌려드리고자 보차공존도로로 만들었습니다.’ 이제 걷고 싶은 길의 시범지구는 마련되었다. 널리 전파하는 일이 남았다.

그러나 이 길은 미완성이다. 서울시의 계장도, 국장도, 시장도 넘어설 수 없는 힘이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공연히 길을 단장해 사람들이 오가면서 성가시게 하지 말고 조용히 있게 해달라는 존재. 권력은 크기로 이야기한다. 하비브 하우스(Habib house)라는 명패가 붙은 집의 담은 덕수궁의 담보다 길고도 높다.

덕수궁길은 분수대에서 갈라진다. 미국대사관저로 넘어가는 길과 정동으로 올라가는 길이다. 덕수궁길은 미국대사관저로 이어지지만 우리는 정동으로 올라가야 한다.

당신은 낙엽과 꽃향기가 가득한 길과 시위진압 방망이, M16소총이 버티고 있는 길 중 어디를 택할까. 동쪽 길의 정동극장 쌈지마당에서는 시화전, 길거리 음악회, 벼룩시장이 끊이지 않으면서 사람들을 부른다. 그러나 옆길에는 미대사관저 테니스장의 펜스만 높이 솟아있다. 가로수도 벤치도 없다. 대신 임시검문중이라는 팻말이 버티고 있다. 이 길의 주인은 누구인가.

미국대통령과 찍은 사진이 있어야 대통령선거에서 이긴다고 믿는 나라,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는 삼십 년 동안 쓰고도 잘 못쓰면서 세 살 박이 아이들에게는 영어단어부터 외게 하자는 나라. 미군 주둔지를 되찾자는 이야기가 자꾸 공허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오등(吾等)은 자(玆)에 아(我) 대한민국의 독립국임을 선언하였는가.

덕수궁길은 아름답다. 걷자. 그러나 이 길에서는 꽃과 낙엽 너머 궁궐에 새겨진 맹수들의 이빨자국도 보아야 한다. 돌담을 따라, 기어이 미국대사관저 앞을 지나 덕수궁을 한바퀴 돌자. 왕궁의 담허리를 차지한 영국대사관은 당신의 길을 막는다. 광복 직후의 지도에서도 통하던 이 길을 막은 힘은 무엇이었을까. 성공회는 이국에 전파를 하면 그 나라의 전통건축 양식으로 교회를 짓는다. 건축으로 번안된 포용과 겸손함이다.

그러나 조선의 건축이 아름다운 로마네스크 양식이었던가. 그 종탑이 전망대처럼 왕궁을 내려다보게 하는 것이 사라진 왕조에 대한 이국의 예절이었던가. 러시아의 공사관이 궁궐보다 높은 곳에서 궁궐을 내려다보며 지어질 때, 그 나라는 독립국이었는가.

은행나무와 느티나무가 더 자라면 거리는 더 아름다워지겠다. 하늘은 여전히 푸를 것이다. ‘삼월 하늘 가만히 우러러보며, 유관순 누나를 생각합니다…’

서현(건축가)hyun1029@chollia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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