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현장 긴급점검①/핵심中企의 현주소]기초산업 흔들

  • 입력 1998년 9월 27일 19시 58분


《IMF관리체제 11개월째. 하루에도 수백개씩의 기업이 쓰러진다. 산업간 ‘연결고리’를 맡았던 기초 기업들이 하나 둘 죽어가면서 대기업―중소기업간 네트워크가 급속히 붕괴되고 있다. 산업 현장은 지금 금융권 구조조정이 지지부진하면서 절망적인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붕괴위기를 맞은 한국경제, 현장진단으로 활로를 모색한다.》

인천 남동공단의 유압프레스업체 N사. 기계제조의 기초설비인 프레스는 자동차 전기전자 반도체 등 대부분의 공장에 안쓰이는 곳이 없는 ‘중핵부품’ 중 하나.

이 회사 P이사는 “10년 동안 영업하면서 받은 어음이 부도난 것은 지난해가 처음”이라고 말했다. 기아와 만도가 부도나면서 한해 순익에 맞먹는 4억원을 공중에 날려버린 것.

N사의 주고객은 기아 등 대기업. 모(母)기업에 해당하는 이들의 가동률은 한결같이 30∼50%대로 바닥권이다. 한때 납품 물량을 대기 위해 밤샘작업을 벌였던 N사도 이젠 일감을 구하기 어렵다. 자구책으로 상여금과 수당을 없애자 50명의 엔지니어 중 10여명이 “퇴직금이라도 챙기겠다”며 회사를 떠났다.

공단에 돈가뭄이 극심해지면서 일감이 들어와도 문제다. 30%였던 수주계약금을 대기업들이 10% 수준으로 깎는 바람에 당장 공장 돌릴 자금이 막막해진 것. 비싼 이자를 주고 은행에서 융자받으려 해도 ‘담보타령’에 말문이 막힌다. 아직까지는 공단 내에서 알짜업체로 소문나 있지만 ‘한달 앞이 걱정스럽기’는 부도업체나 다를 바 없다. P이사는 “정부는 기아처리가 한달 늦어질 때마다 협력업체가 수십개씩 무너진다는 다급한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며 현장을 쳐다보지 않는 중앙정부의 일처리방식을 안타까워 했다.

창원 공단 한복판에 자리잡은 중소업체 H기계는 일반인에겐 무명에 가깝지만 유명 제조업체 사이엔 ‘없어서는 안될’ 업체로 통한다. 모터 베어링 기어 등을 바탕으로 선반 밀링머신 등 ‘마더머신(기계를 만드는 기계)’을 만들어 조선 자동차 전자업계에 납품하는 것.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 들어 대기업들이 설비투자를 완전 중단하면서 이 회사 근로자들은 요즘 창업 50여년만에 처음으로 ‘3일 근무―4일 휴무’체제로 돌아섰다. 5천평 이상 널찍한 공장에 들어선 강철 가공설비 중 굉음을 내며 돌아가는 것은 절반 정도.

공장설비와 인력의 절반이 놀고있지만 관련 법규에 따라 통상 임금의 100%가 꼬박꼬박 나간다. 단기차입금을 아예 쓰지 않을 정도로 재무구조가 탄탄했던 이 회사도 어쩔 수 없이 골병이 깊게 들고 있다. 광주 N선반 등 20여개 동종업체가 올해 초 도산 후 덤핑을 치는 바람에 민수시장은 포기하고 기술계 학교 납품물량에 의지하며 겨우 연명해가는 처지다.

기아기공 한화기계 등 동종업계 대기업들도 모그룹이 휘청거리면서 소유권이 외국업체에 넘어가거나 개점휴업 상태다.

H사도 차세대 공작기계 개발을 목표로 일본과 손잡았던 합작업체 지분을 눈물을 머금고 다시 일본업체에 넘겼다. ‘설비 국산화’의 꿈은 더욱 아득해진 셈이다.

이 회사 L부장은 “공작기계업계 붕괴는 곧 한국 제조업의 마지노선이 무너지는 것과 마찬가지”라며 “기업의 설비투자 의욕을 살리기에는 정부의 현장감각이 너무 한심하다”고 불만스레 말했다.

울산 방어동에서 39년째 중형선박을 건조해온 청구조선은 4백여 협력사를 거느린, 5천∼2만t급 선박건조에서는 상당한 경쟁력을 갖춘 업체. 설비확장의 후유증으로 지난 연말 부도를 낸 뒤 지루한 법정싸움(법정관리 신청→항고신청중) 과정에서 조선소가 통째로 ‘고철더미’로 변했다.

근로자 임시숙소 근처엔 잡초가 어른 키높이만큼 무성하고 3∼4m 높이의 철판블록과 선대(船臺·슬라이딩 도크)에는 시뻘건 녹이 붙어 있다. 태국선사가 발주한 1만8천t급 화물선은 부도로 엔진납품이 안돼 자칫 ‘무동력선’이 될 처지.이 회사가 현재까지 외국에서 수주한 선박은 특수화학선 등 12척. 최소 수백억원이 투입되는 선박금융을 은행권이 감당하지 못하는 바람에 부도를 냈지만 외국선사들은 아직도 ‘배만 인도받을 수 있다면 추가 계약금을 내겠다’고 아우성이다.

그러나 정작 H, I은행은 막대한 자금부담을 우려, 청산쪽으로 기울고 있다. 이 회사 근로자대표 정동성(鄭東星·32)씨는 “퇴사하고 실업수당을 받으면 그만이지만 이제까지 축적한 제조노하우나 설비가 너무 아까워 무보수로 매일 출근하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한 중소기업 사장은 “우리나라는 중소기업 사장의 머리 속에 노하우가 다 들어있는데 기업을 안하겠다는 중소기업 사장이 많아져 산업 잠재력에 심각한 위기상황이 오고 있다”고 걱정했다.

울산 상공회의소의 한 관계자는 “종금사 퇴출에 이어 은행권이 몸을 사리는 바람에 유망 수출기업도 문을 닫는 사례가 급증하고 있다”며 금융권 구조조정 작업의 속도에 중소기업 목줄이 달려있다고 강조했다.

〈울산·창원〓박래정·홍석민기자〉ecop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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