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중구칼럼]대통령이라는 자리

  • 입력 1998년 2월 27일 20시 07분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취임사를 읽어내려가다 말고 목이 메었다. 필생의 꿈이 현실로 이뤄지는 날 만가지 감회가 겹쳤을 것이다. 국무총리지명자의 국회인준 무산을 지켜보고 잠자리에 들었으나 불면의 첫 밤을 보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영광 못지않게 고난의 길로 들어섰음을 실감하는 하루였을 것이다.

▼ 국정-국민통합의 구심점 ▼

대통령이 어떤 자리인가. 국정의 중심, 국민통합의 구심점이다. 권력이 막강한 만큼 책임 또한 막중하다. 나라일이 잘못되면 하나에서 열까지 모든 책임은 결국 대통령에게 돌아간다. 국정뿐만 아니라 사회분위기가 잘못되면 그것까지도 ‘부덕의 소치’로 책임을 져야 하는 자리다. 대통령이 우울하면 나라가 불안하고 대통령이 흔들리면 국민도 덩달아 흔들린다.

런던의 코벤트 가든, 로열 오페라 하우스의 로열 박스는 무대가 잘보이는 전면의 특등석이 아니다. 무대 바로 왼쪽 2층의 첫번째 칸에 자리잡고 있어 관중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벽에 걸린 거울을 통해 관람해야 한다. 영국 여왕은 오페라를 관람하기보다 자신의 건재를 국민에게 보이기 위해 이곳에 들르곤 한다. 국가원수는 국민통합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한때 케네디대통령의 헤어스타일이 크게 유행한 적이 있었지만 북한사람들의 팔(八)자 걸음만 해도 김일성을 흉내낸 것이다. 좋든 싫든 국가지도자의 영향력은 그만큼 무섭다.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이 곧바로 국정과 나라분위기에 직간접으로 영향을 미치는 공인(公人) 중의 공인이 대통령이다. 지나가다 무심코 던진 한마디가 엄청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사정이 이렇고 보면 공사석의 말 한마디 표정 하나까지도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다. 나라의 운명이 걸린 중대사를 다룰 때는 더욱 그렇다.

될수록 말을 아끼고 골라쓰되 스스로 족쇄를 채우는 ‘절대로’ ‘반드시’같은 극단적 용어나 주워담기 어려운 즉흥적 발언은 삼가야 한다. 특히 김영삼(金泳三)전대통령의 대화는 단문형이지만 김대중대통령은 복합형이다. 전체를 뜯어보면 매우 논리적이나 어느 한대목만 거두절미할 경우 자칫 와전이나 오해를 부를 소지가 많다.

여론을 존중하고 따르도록 노력해야겠으나 끌려가서는 안된다. 나라를 위하는 길이라면 때로 거스를 줄도 알아야 한다. 희망은 주되 환상은 심어주지 말아야 한다. 민주국가에서 90%가 넘는 지지도는 정상이 아니다. 독단 독선 독주는 거기서 싹튼다. 신기루같은 인기를 좇다가는 전임자의 전철을 밟기 십상이다. 고언(苦言)일수록 달게 들어야 한다. 무엇보다 직언(直言)에 면박주지 말아야 한다. 화(禍)를 막을 기회를 놓치게 된다.

역대 대통령이 그토록 경계했으면서도 잘 안된 것 중의 하나가 친인척관리와 측근정치의 덫이다. 대통령이라면 더이상 올라갈 곳이 없는 극상의 자리다. 나라가 잘되고 국민이 편안해진다면 거기서 더 바랄 것이 무언가. 그러나 수하는 다르다. 유혹에 약할 수밖에 없다. 초야에 묻힌다 해도 세도따라 움직이는 해바라기들이 가만두려 하지 않을 것이다.

집권세력이 공(公)보다 사(私)에 기울면 비극은 시작된다. 마음을 독하게 먹고 모든 연(緣)으로부터의 자유와 단절을 선언할 필요가 있다.

▼ 겸허한 자세로 임해야 ▼

국난의 시기에 나라를 맡은 김대통령은 자신에게 부여된 막강한 권한을 국민과 국가 민족을 위해 유용하게 잘 써야 한다. 누구와 대결할 생각은 버려야 한다. 국정을 원만하게 풀어가려면 비토그룹부터 포용하고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들의 마음을 얼마나 열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

많은 준비가 있었다 해도 편견을 버리고 국정에는 초심자라는 겸허한 자세로 임해야 옳다. 그러자면 역시 비전과 제도로 움직여야 한다.

남중구(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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