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블록버스터 혹은 일본 애니메이션인 줄 알았는데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된 한국 독립영화다. 더구나 청춘 영화란다. 영화감독이 되려는 남자가 영화 만드는 것도 잘 안 되고 여자 친구도 떠나는 상황에서 극심한 스트레스로 실어증에 걸린다.
“팔레스타인해방전선, 인민해방전선 하면 멋있어 보이잖아요. 그런데 그런 것들이 실제로 해방시켜 주느냐 하면, 그건 아니더라고요.”(윤성호 감독) 제목은 여자친구 ‘은하’에게서 해방되고 싶지만 잊지 못해 해방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그의 단편영화 중엔 2002년 대선을 배경으로 여러 사회 현상을 다룬 ‘중산층 가정의 대재앙’, 아줌마에 관한 다큐멘터리 ‘회화식 아줌마 입문’(‘회화식 일본어 입문’에서 힌트를 얻었다)도 있다. 시놉시스만 쓰다 영화가 안 될 것 같아 접어 버린 ‘가라 가라 아토피 소녀’는 대규모 간척사업지 새만금에 사는, 아토피피부염에 걸린 여자 심은하(스타 캐스팅 불가, 이름만 살짝 빌렸다)가 마라도의 환경 콘서트를 보러 가는 이야기. 윤 감독은 “영화를 못 만들어 제목으로 튀어 보려는 것”이라고 했지만 지나친 겸손이다. 독립영화계에서 주목받는 감독인 그의 작명 센스는 유명하다.
최근 독립영화 가운데 유난히 튀는 제목이 많다. 상영 중인 양해훈 감독의 ‘저수지에서 건진 치타’는 고등학교 때 괴롭힘을 당하고 방에 처박혀 살던 남자가 그를 괴롭히던 동창을 다시 만나면서 벌어지는 일들. “학창 때 반마다 꼭 ‘왕따’를 당하는 아이들 별명이 치타였죠. 타잔이 ‘가자, 치타’라 할 때 그 치타. 주인공 별명이면서 ‘왕따’를 통칭해요.”(양 감독)
영화는 주인공이 “얼어붙은 저수지 위를 건너면 다시 괴롭히지 않겠다”는 말에 불안하게 얼음 위를 걷는 것으로 시작한다. 감독은 모든 치타를 저수지에서 건져 내고 싶었나 보다. 자살에 관한 단편을 묶은 옴니버스 영화 ‘판타스틱 자살소동’은 그중 ‘해피 버스데이’를 만든 김성호 감독이 제목을 지었다. 소피아 코폴라 감독의 ‘처녀 자살 소동’과 스칼렛 조핸슨이 나오는 ‘판타스틱 소녀백서’(원래 제목은 ‘고스트 월드’)를 참고했다고.
튀는 제목이 꼭 좋은 건 아니다. 내용만으로 승부하는 영화가 더 많다. 그러나 마케팅할 돈도 기회도 별로 없는 이들에겐 제목이라도 튀어야 한다는 절박함이 있다. 예전에 ‘대학로에서 매춘하다가 토막살해당한 여고생 아직 대학로에 있다’나 신성일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신성일 행방불명’ 같은 독립영화 제목은 아직도 생각난다.
이런 제목에선 독립영화의 ‘자유’가 느껴진다. 상업영화 제목은 여러 단계를 거쳐 대중이 무난하게 좋아할 만한 것으로 결정되지만 독립영화는 감독(주로 각본도 쓴다)이 개성대로 제목을 짓는다. 자본의 속박 안에선 결코 누릴 수 없는 특권! “왜 이렇게 지었느냐고? 내 맘이야!”라는 듯.
채지영 기자 yourca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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