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리뷰]'휴먼 스테인'…사랑하기에 추락도 두렵지 않아

  • 입력 2004년 3월 2일 17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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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치명적 약점이 있다. 약점을 안고 사는 두 남녀가 한치 앞을 모르는 절망적인 사랑에 빠져드는 영화 ‘휴먼 스테인.’ 사진제공 영화인
누구에게나 치명적 약점이 있다. 약점을 안고 사는 두 남녀가 한치 앞을 모르는 절망적인 사랑에 빠져드는 영화 ‘휴먼 스테인.’ 사진제공 영화인
영화 ‘휴먼 스테인(The Human Stain)’의 핵심은 앤터니 홉킨스(67)와 니콜 키드먼(37)의 캐스팅에 있다. ‘아버지와 딸’ 벌인 두 사람은 영화 속에서 베드신까지 벌인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이 영화의 아킬레스건도 바로 캐스팅이다.

대학의 고전문학 교수 콜만 실크(앤터니 홉킨스)는 강의 중 무심코 내뱉은 한 마디가 인종차별 논란에 휩싸이면서 하루아침에 강단을 떠난다. 충격을 받은 아내는 심장마비로 숨진다. 실의에 빠진 콜만은 우연히 잡역부로 일하는 젊은 여성 퍼니아(니콜 키드먼)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나이와 신분을 뛰어넘은 사랑에 집착하는 콜만에게 사회의 비난이 쏟아지고 두 사람의 위험한 과거는 얼굴을 드러낸다.

클린턴과 르윈스키의 떠들썩한 스캔들 소식으로 시작하는 이 영화의 핵심 코드는 ‘클린턴’이다. 클린턴이 누군가. 누구에게나 숨통을 조이는 치명적 약점이 있음을 상징하는 존재다. 클린턴에 얽힌 스캔들이 권력 때문에 빚어졌다면, 콜만이 겪는 스캔들은 삶의 절망에서 비롯된다. “비아그라가 없었다면 난 그저 나의 늙어감을 철학적으로 미화하며 살았을 테지”라고 되뇌는 콜만의 모습에선 인생의 상처가 묻어난다.

이 영화는 지적이고 인간적이다. 영화는 어떤 상황에서도 급류를 타지 않는다. 콜만에 얽힌 비밀은 ‘쨘’ 하고 밝혀지기보다는 회상을 통해 서서히 드러난다.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를 연출한 로버트 벤튼 감독은 스릴러 구조를 가진 이 영화의 템포를 아주 오래된 이야기처럼 느슨하게 풀어버림으로써 두 남녀의 러브스토리가 격정적이기보다는 절망적으로 다가오도록 했다. 콜만이 입맞춤보다는 퍼니아의 목을 애무하는 데 집착하는 것도 둘의 관계를 ‘성욕’이 아닌 ‘교감’의 차원에서 풀겠다는 감독의 시각이 읽히는 대목이다.

필립 로스의 원작소설이 콜만과 퍼니아를 통해 인종과 계층이라는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짚어나갔지만 영화는 주제의식보다 두 할리우드 스타의 슬픈 로맨스에 초점을 맞춘다.

니콜 키드먼의 변신은 늘 즐겁지만, 언제나 성공적인 것은 아니다. 손톱 밑에 때가 낀 억척 여성으로 변신하기 위해 그는 반 옥타브 낮춘 탁한 목소리에 광대뼈와 턱선을 강조한 메이크업을 했다. 그러나 소에게 건초를 주는 키드먼의 모습은 잠시 하녀가 외양간을 비운 사이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현하는 어여쁜 공주 같다.

콜만이 수십 년간 가족을 등지고 살면서까지 지켜온 비밀은 충격적이다. 그런데 문제는 충격의 강도가 아니라 그 개연성에 있다. 앤터니 홉킨스가 아무리 명배우라지만, 그가 숨겨온 비밀의 정체는 놀랍기보다 다소 황당하다. 니콜 키드먼과의 베드신도 왠지 퍼니아의 낡은 침대처럼 삐걱거린다. ‘한니발 렉터 박사’의 넘치는 살의(殺意)가 넘치는 애욕(愛慾)으로 치환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만…. 5일 개봉. 15세 이상 관람 가.

이승재기자 sjd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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