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의 컬처플러스]6mm 카메라가 본 'VJ 24시'

  • 입력 2002년 2월 24일 17시 15분


안녕하세요. 저는 6mm 카메라 ‘종횡무진(縱橫無盡)’입니다. 제품명은 ‘SONY PD100-A’구요, 종횡무진이란 멋진 이름은 한반도를 구석구석 함께 누비자며, 제 주인 조철수(가상인물)님이 손수 지은 것이랍니다. 철수님의 직업은 비디오 저널리스트. 흔히 VJ라고 하죠.

TV를 좋아하지 않는 분도 VJ들의 활약상을 모르지는 않을 겁니다. KBS2‘VJ 특공대’ MBC‘출동 6mm 현장 속으로’같은 프로그램을 한두 번은 시청했을 테니까요. 처음에는 자정 가까이나 이른 아침에 시청자들을 찾아갔습니다만, 서너 명의 VJ가 담아온 경쾌한 영상이 어느새 황금시간대를 차지했을 뿐 아니라 재방송까지 하는군요. 그 바람에 철수님과 저는 더욱 바빠졌지요.

철수님의 취미는 형광펜 들고 신문 샅샅이 읽기.

러시아의 소설가 도스토예프스키도 ‘악령’을 비롯한 여러 작품의 소재를 신문 기사로부터 얻었다나요. 철수님은 ‘부음란’까지 꼼꼼히 살핀 후에야 늦은 아침을 먹고 거리로 나선답니다.

철수님의 특기는 처음 만나는 사람의 마음 사로잡기.

왼뺨의 보조개를 살짝 드러내면서 해맑은 웃음으로 접근하면 열에 아홉은 철수님의 부탁을 받아들인답니다. 제작비를 아껴야하는 철수님으로서는 길거리를 오가며 만난 이들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해요.

또 다른 특기는 잠 안 자고 오래 버티기.

몇 년 전 영화 오래 보기 행사에서도 마지막 세 손가락 안에 들었어요. 제 친구 6mm 포터블 편집기 ‘화룡점정’(畵龍點睛, 이 친구의 제품명은 PANASONIC AJ-LT75P이랍니다)과 함께 사나흘 밤을 지새우는 것은 흔한 일이랍니다.

철수님은 기획에서 촬영 편집까지를 혼자 도맡아 합니다. 기획안을 쓸 때 지인들에게 전화를 걸어 자문도 구하고, 좀더 세련된 편집이 필요할 때 편집기사를 소개받기도 하지만, 시작부터 끝까지 작품을 만드는 이는 어디까지나 철수님이죠. 이렇게 고독한 작업방식은 철저한 분업에 근거하여 작업의 전체적인 틀을 이끌어가는 극영화 감독보다도 구상과 집필 퇴고를 혼자 하는 소설가에 더 가까워 보인답니다.

한편으로 크고 요란한 문화상품이 주목받고 한편으로 대부분의 분야가 세분화의 길을 걷는 시대에 철수님 같은 VJ와 저 같은 6mm카메라가 인기를 끄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선 기동력을 들 수 있겠습니다. 버스나 택시의 출입을 막는 골목으로 중국집 배달원의 낡은 오토바이가 자유롭게 다니는 것을 보신 적이 있으시지요. 철수님과 저는 그 좁고 어두운 삶의 표정과 인간의 운명을 빠르고 정확하게 담아낼 수 있답니다. 둘째는 친근함입니다. 촬영 전에 신뢰만 쌓는다면, 우리네 이웃들은 조그맣고 귀여운 종횡무진 앞에서 한결 자연스러워지거든요. 마지막으로 변신의 자유로움입니다. 기획을 아무리 철저하게 해도 촬영에 들어가면 돌발 변수들이 생기지요. 공동작업이라면 이런 부분을 작품에 반영하기 힘들지만, 철수님과 같은 VJ는 번뜩이는 재치와 결단으로 곧 틀을 바꿀 수 있어요.

우리들의 작업은 시간과의 싸움입니다. 방송국과의 약속을 지켜야 하니까요. 코피를 쏟으며 일하더라도 보수가 넉넉한 편은 못됩니다. 철수님은 한 작품이 끝날 때마다 소줏잔을 기울이며 좀더 넉넉한 시간과 좀더 충분한 재정을 아쉬워하지요. 그래도 저 종횡무진을 하루라도 손에서 놓지 않는 것은 더 나은 작품에 대한 갈망 때문입니다. 프로는 작품으로 말하는 것이니까요.

요즈음 철수님은 고민이 한 가지 더 생겼습니다. 기획과 편집은 방송국에서 할 테니 촬영만 맡아달라는 제안을 받은 것이죠. 생각보다 보수도 괜찮고 기획이나 편집에서 골머리 앓을 일이 없는 것은 다행입니다만, 찍기 전에 기획자의 간섭을 받아야 하고 찍고 나서 자신의 영상을 남의 손에 맡긴다는 것이 불안한가 봅니다. 벌써 철수님의 친구들 중에는 전문 6mm 촬영감독으로 나간 이가 여럿 있지요.

철수님이 어떤 결정을 내리든지, 저는 철수님을 믿습니다. 잠시 외도 아닌 외도를 하더라도, 노트에 빽빽하게 적어놓은 구상들을 멋진 다큐멘터리 작품으로 완성시키기 위하여, 다시 이 고독한 공간으로 돌아올 테니까요. 컵라면을 비운 철수님이 군용점퍼를 걸치네요. 오늘은 철거지역 무허가 주민들의 겨울나기를 촬영할 예정입니다. 종횡무진 누비고 오겠습니다.

소설가· 건양대교수 tagtag@freech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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